▲ 김진호 논설위원
▲ 김진호 논설위원

누구나 잘 아는 심청전의 얘기다. 눈 못 보는 심봉사의 딸 어린 심청은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공양미 300석에 중국상인들에게 팔려 바닷물에 몸을 던졌다. 하지만 우여곡절끝에 심청은 죽지않고 오히려 왕후의 자리에 오르게 되고, 아버지를 찾기위해 맹인잔치를 벌인다. 그때까지 눈을 뜨지 못하고 있던 심 봉사가 맹인 잔치에 나타나고, 아버지를 본 심청은 그의 목을 얼싸안고 이렇게 통곡했다. “아이고 아버지, 여태 눈을 못뜨셨소. 몽은사 화주승이 공들인다 하더니만 영검이 덜혀선가. 아이고 아버지, 인당수 풍랑중에 빠져 죽은 심청이 살아서 여기 왔소.” 이 말을 들은 심 봉사, 심청이의 얼굴을 부여잡고 통곡한다. “아니, 누가 나더러 아버지라고 혀. 나는 자식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오. 내 딸 심청이는 애비 눈뜨게 한다고 인당수에 빠져 죽었는 데 어디라고 살아오다니. 이게 웬말이냐. 이것이 꿈이냐 생시냐. 꿈이거든 깨지 말고 생시거든 다시 보자” 그 순간 심봉사는 감은 눈을 희번덕 뜸으로써 맹인에서 벗어나게 되고, 꿈에도 그리던 딸 심청이의 얼굴을 보게된다.

판소리 심청전의 가슴 뭉클한 이 대목을 들을 때 마다 나는 엉뚱한 상념에 빠진다. 만약 심봉사가 평소에 딸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면 심청이와 같이 지낼 때에 벌써 눈을 떴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심 봉사가 공양미 300석에 딸까지 잃어버린 후 천우신조로 심청이를 다시 만났을 때 눈을 뜨게 된다는 건 무엇을 말하는 걸까. 바로 절망의 밑바닥을 박차고, 운명을 거슬러 오를 만큼 간절한 마음이 온 몸과 마음을 사로잡았을 때 눈을 뜨는 기적도 가능하다는 뜻이리라.

`눈 뜨고 보는 일이 기적처럼 위대함`을 설파한 또 다른 사람은 바로 헬렌켈러다. 어릴 때 뇌척수염으로 추정되는 병을 앓아 시력과 청력을 잃고, 말하는 법까지 잃어버린 헬렌켈러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세계에 갇혀 버렸다. 그런데도 그녀는 촉감으로 세상을 만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줄 알았다. 그녀의 밝은 마음은 가정교사로 온 설리번 선생의 도움으로 빛을 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물`이라는 단어 하나로 7년동안 사투를 벌인 그녀는 나중에 하버드대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5개국어를 정복했다. 이후 그녀는 세계를 돌며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도왔다. 어느 날, 세상 모든 것에 호기심이 많았던 헬렌 켈러는 숲 속을 거닐다 온 친구에게 “뭘 봤느냐”고 물어본다. 그러자 친구는 “특별한 게 없었다”고 대답한다. 헬렌 켈러는 그런 친구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두 눈이 멀쩡히 있는데,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니….` 그때 헬렌 켈러는 만약 자신이 단 삼일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하고 싶은 일을 글로 적는다. 먼저 설리번 선생님의 얼굴을 보고, 그 다음 바람에 나풀거리는 나뭇잎과 들꽃을 보며, 마지막으로 아침에 출근하는 사람들의 표정과 오페라 하우스와 영화관의 멋진 공연을 볼 거라고 정한다. 우리에게는 익숙한 일상이 헬렌 켈러에게는 기적 같은 순간이자 평생의 소원이었다.

현세의 기적은 현재의 소중함을 알고, 최선을 다하는 간절한 마음, 소망에서 비롯된다. 그런 삶은 아름답다. 동양철학자 한형조 교수의 금강경 별기인 `붓다의 치명적 농담`에 나오는 에피소드다. “스님도 도를 닦고 있습니까?” “닦고 있지” “어떻게 하시는데요?”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잔다” “에이, 그거야 아무나 하는 것 아닙니까? 도 닦는 게 그런 거라면 아무나 도를 닦고 있다고 하겠군요” “그렇지 않아, 그들은 밥 먹을 때 밥은 안 먹고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고 있고, 잠 잘때 잠은 안자고 이런저런 걱정에 시달리고 있지.”

밥 먹을 때 걱정하지 말고 밥만 먹고, 잠 잘때 계획 세우지 말고 잠만 자라는 거다.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게 그리 쉽고 간단치 않다는 역설로도 들린다.

한평생 간절한 마음으로 민주화를 위해 애썼던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을 떠나보내는 영결식으로 분주한 하루해가 저물었다. 그리고 새벽은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