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영숙 수필가
햇살이 날을 세우고 덤벼들던 여름 동안 가을이 영영 올 것 같지 않아 몹시 그리웠다. 이제 그 그립던 가을도 짙어졌다.

한두 잎 우아하게 떨어지던 잎들도 지친 것인가. 건듯 부는 바람에 빗물처럼 쏟아져 땅 위에 눕는다. 떨어져 누워야 제 소명을 다 하는 것인 듯 그렇게.

며칠 전 올해 세 번째의 조문을 다녀왔다. 달포 전의 문상 때 팔순을 넘겨 떠난 지인의 부친 앞에서는 그저 경건하였다. 그것이면 되었다. 그러나 후배의 영정 앞에서는 눈물이 그렁하게 고인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감으면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질 것이어서 자꾸만 눈물을 삼키었다.

무성영화처럼 세상의 소리는 다 죽고 검은 옷의 상주와 문상객들의 동작만이 활동사진처럼 분주하였다. 영정사진 속의 그는 조용히 웃고 있었다. 어느 한때, 자신의 세상과의 빠른 결별을 모르고 있던 행복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한 치 앞을 모르는 저 맑은 웃음이라니. 그가 웃고 있지만 않았어도 나는 그렇게 처연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앞의 길 위로 무엇이 놓여 있을 것인지 모른다는 것에 우리는 암묵적인 동의를 한다. 어드멘가 우리를 부르는 그 무소불위의 힘은 인간이 세상으로 왔던 차례를 지켜주지 않는다. 모두가 그러하듯 그도 자신만의 지도와 나침반으로 항해하다가 거센 물결을 만나 그 소용돌이에 부서지고 만 것이다.

그렇게 일순 삶의 경계 이쪽저쪽으로 나뉘어졌다. 사람살이의 허망함이여 그 씁쓸함이여.

죽은 자에 대한 애절한 정은 다시는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영원한 결별이란 얼마나 캄캄한 것이냐. 슬픔에 대한 저항력은 생기지 않는 것일까. 슬픔이 올 때마다 면역 없어, 또 아프다.

여인답지 않게 성품이 호방하고 너름새가 푼푼하여 같이 있으면 유쾌해지는 사람이었다. 그와의 아름다운 기억은 문신으로 남아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가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선배라고 부르며 사진틀을 박차고 나올 듯하다. 우리의 생은 돌아갈 것을 전제로 출발한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이토록 망연할까. 성미 급한 사람, 어찌하여 그 길을 그리 서둘렀는가. 사위어가던 신체의 기관이 물의 흐름을 잠가버린 얼음처럼 일시에 기능이 정지되었으리라. 이제 그를 구성하던 모든 것들은 흐름을 멈추어 다시는 밖으로 표출되지 못하고 껍데기 속에 갇혀 육신과 함께 소멸해갈 것이다. 육신과 결별한 그의 영혼은 윤회하여 다음 생에서 는 장생을 누려야 하리.

언제인가 한 친구가 악에 받친 우리들만 살아남았다고 한 말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다. 아까운 한 사람이 가버렸다. 그리고 또, 남은 자들의 남루한 삶의 행진은 계속될 것이다.

장례식장을 나선다.

이제 나무들은 거의 벌거벗었다. 떨어져 누운 낙엽에 한 해를 마감하는 우수가 묻어 있다. 주변은 철시한 상가처럼 쓸쓸하다. 그 속을 조문객들이 종종걸음으로 들어온다. 누구의 영전으로 가는가. 깊은 추모를 위하여, 그저 사람의 도리를 위하여 모두들 분주하다. 그들이 이곳을 떠나는 순간 고인은 잊혀진다. 그것이 사람의 매정함이다. 아니 삶의 매정함이다.

한 줄기 회한이 일어난다. 우리는 그가 병상을 지키기 얼마 전 만날 수도 있었다. 서로의 일정이 엇갈려 내일, 모레 하던 터였다. 얼마 후, 전화통화에서 그가 잠들었다는 가족의 말만 들었을 뿐, 그와는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또 한 번의 통화에서도 다를 바가 없었다. 유추해 보면 그때, 그는 이미 영면(永眠)으로 바투 다가서고 있었던 듯하다. 그토록 황망히 그는 가버렸다.

그렇게 미룰 것이 아니었다. 간단없이 돌아가는 일상의 쳇바퀴에 치여 서로 만나지를 못했다. 무슨 우선순위가 그리 많았던 것일까. 그때 한 번 보았더라면 이렇게 아쉽지는 않으리.

그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세상의 모습, 아름다운 가을을 그에게 헌정하고 싶다. 이제, 이승에서 사진으로만 존재하는 그가 몹시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