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드라의 구슬을 찾아서

▲ 가파도 대원사 관세음보살상<br /><br />
▲ 가파도 대원사 관세음보살상

배는 방어축제로 술렁이는 모슬포 항을 떠나 섬 속의 또 다른 섬을 향해 달린다. 겨우 20분이면 닿는 거리지만 뱃길은 결코 만만치 않아 보인다. 몇 명 되지 않은 승객을 실은 배는 생각보다 컸다. 하지만 높은 파도의 힘에 크게 울렁이며 가파도로 향한다.

어제까지 내린 비로 가파도에 갇혔던 사람들이 흐린 하늘을 이고 몰려 있다. 내리는 사람보다 떠나는 사람이 많은 선착장에서 우리를 맞는 것은 바람뿐이다. 봄이면 청보리 축제로 몸살을 앓는 곳, 인적이 드문 가을날 찾은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한 무리는 우측 해안을 따라서 걷고 우리는 좌측 해안도로를 걷는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키가 작은 섬, 해발 20.5m의 나지막한 가파도는 그 흔한 언덕하나 없이 평평하다. 송악산에서 바라본 가파도는 밋밋하고 별 특징 없는 섬이었다. 하지만 섬에서 바라본 풍경은 달랐다. 날마다 그리움을 실은 파도가 먼 바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뜨내기손님들이 육지의 소식을 전해 주는 순결한 섬이다.

송악산 갈대들의 노랫가락이 손에 잡힐 듯하고, 그 뒤로 산방산이 우뚝하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멀리 한라산을 바라보며 최남단의 작은 섬 마라도를 보살피는 의젓함도 지녀야 할 섬이다. 흙, 바람, 돌, 파도가 만들어낸 태곳적 묵직함이 그대로 남아 있다. 단순함이 빚어내는 아름다움, 그 속에는 애환을 담은 서사가 있고 평화를 노래하는 시(詩)가 존재한다.

지중해를 닮은 코발트빛 지붕이 산토리니 섬을 상징한다면 가파도의 지붕은 하나같이 하얀 벽에 붉은 지붕을 이고 있다. 대지에 따개비처럼 몸을 낮추고 도란도란 모여 살아가는 처마 낮은 집들이 주는 정겨움 속에는 강인함도 보인다. 섬은 고요한 듯 침묵하지만 때로는 포효하듯 사나우리라.

비어 있는 들은 황량해 보이지만 무한한 가능성이 꿈꾸고 있다. 고흐의 `씨 뿌리는 사람`을 떠올리다가, 나는 청보리와 유채꽃을 심기로 했다. 이내 초록과 노랑 물결이 번갈아 넘실대는 한 폭의 수채화가 되어 안겨든다. 바람의 몸짓과 파도의 언어에 익숙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완벽한 작품, 나는 어느새 섬과 하나가 된다.

큰 파도가 덮치면 모습을 감출 듯 연약해 보이지만, 탄소 없는 섬으로 유쾌하고 건강미가 넘치는 곳, 작은 전원주택 하나 가지고 싶은 나의 꿈을 내려놓고, 오늘은 허락도 없이 가파도의 주인이 된다. 하나의 점이 되어 제주도의 배경이 되어도 좋고 지구본 속에는 등장하지 않아도 좋다. 바람도, 구름도, 파도도 지금 이 순간 내가 서 있는 가파도를 향해 모여들고 흩어진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행복하다.

들판 사이로 난 길을 걷는 사람은 우리뿐이다. 나와 연결된 것들과의 단절, 그것은 때로는 가벼워짐을 뜻한다. 너무 홀가분해서 바람 같은 섬, 너무 강인해서 돌처럼 묵직한 섬, 때로는 사무치게 외로워서 파도처럼 몸부림치는 가파도다. 여행자에게는 이색적으로 다가오는 여유가 그들에게는 막연한 기다림이거나 희망 없는 인내일 수 있다.

마을로 접어들자 현무암으로 만든 키 큰 관세음보살상이 반긴다. 한국 불교 태고종 사찰인 관세음보살 해수도량, 대원사가 수행하듯 살아간다. 큰 하늘과 바다를 품에 안은 부처님 앞에 서자, 인드라의 하늘에 걸려 있는 수많은 구슬이 떠오른다. 구슬 하나하나는 다른 구슬 모두를 비춘다. 어떤 구슬이든 하나가 소리를 내면 그물에 달린 다른 구슬 모두에게 그 울림이 퍼져 영향을 준다는 화엄사상,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숭고하고 거룩한 일이다.

나와 얽혀 있는 수많은 인연들을 생각한다. 본성을 거르지 않고 부처님 말씀에 귀의하며 살려고 노력했는지 반문하며 극락전으로 향한다. 염불소리가 조용히 절을 지킬 뿐, 인기척이 없다. 붉은 양철지붕을 한 법당에는 아미타부처님이 계신다. 섬사람들의 삶이 곧 수행이며 부처님이었을 텐데, 그들은 무엇을 기원했을까? 작은 법당이 한량없이 커 보인다.

몇 안 되는 관광객들이 드문드문 빈집을 기웃거리며 바람처럼 떠돌고, 그 뒤로 하얀 첨탑이 보인다. 도시 냄새가 나는 짙은 벽돌건물, 교회도 절도 분위기는 다르지만 붉은 지붕으로 통일했다. 299명의 주민들과 갈등 없이 공존하며 살아가는 다른 종교 앞에서 저절로 두 손이 모아진다. 높다랗게 걸려 있는 십자가가 관세음보살상만큼 정겹다.

 

▲ 조낭희 수필가
▲ 조낭희 수필가

끊임없이 테러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사람들, 톨레랑스라는 관용의 정신을 소중히 여기던 프랑스의 분노, 지금 세계는 불안에 떨고 있다. 삶과 신앙의 빗나간 관계를 생각하며 잠시 세계 평화를 위해 기도한다. 놀랍게도 나는 작은 섬에서 처음으로 가장 큰 기도를 한 셈이다. 바람이 해수관음상의 허리를 감싸 안다가 십자가를 한 바퀴 돌고 사라진다. 여전히 하늘은 흐리다.

언젠가 푸른 몸을 일으키며 새벽을 여는 가파도의 청보리밭을 걷고 싶다. 한낮엔 돌담 위를 뒹구는 바람과 놀고, 밤이면 거친 파도를 잠재울 달빛 자장가도 듣고 싶다.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별 같은 섬, 때로는 우주만큼 커 보이는 섬, 그곳에서 나는 인드라의 구슬이 일제히 울리는 것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