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가을 끝자락… 연인과 한걸음, 추억과 한걸음

▲ 1984년 군립공원으로 지정된 경기도 가평군 명지산은 아직도 원시림 상태로 잘 보존돼 있는 산이다. `가평8경` 중 `제4경`인 명지산의 호젓한 등산길은 보기 드문 명 코스다.

이젠 산에 올라도 한창이던 단풍들을 볼 수 없으니 겨울이 오는 길목에서 만나는 산 풍경은 한 주일이 크게 다르다. 11월 중순까지만 해도 울긋불긋 단풍으로 시야가 즐거웠는데 비가 오고 난 뒤라 겨울 산행 맛이 서서히 들기 시작한다.

산행기를 정리하며 안 가본 산을 뒤지다가 산림청 지정 100대 명산의 하나인 가평의 명지산을 생각해냈다. 지난 봄과 여름에도 대구시내의 산악회에서 가는 명지산 등산 기회가 몇 차례 있었지만 다른 산을 타느라 기회를 잡지 못했는데 이번에 동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경기도 가평 명지산, 연인산은 험난한 코스가 아니라서 한겨울에 만들어지는 명지산의 설화(雪花) 풍경을 보러 오를 만하지만 늦가을 혹은 초겨울의 등산도 편안히 오를 수 있는 길이어서 전국에서 찾아오는 산객들이 많다.

참고로 경기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 화악산(1천468m)이고, 명지산(1천267m)은 두 번째로 높은 산이다. 명지산에 오르면 왼편으로는 운악산, 오른편으로는 화악산이 버티고 섰고, 남쪽 방향으로는 연인산이 이어지고 있으니 명산 소리를 듣는 산이어서 평소에 필자는 호감이 갔다.

필자는 명지산 산행 당일 새벽 4시반경에 일어나 약속장소로 나가 드림산악회 회원들과 합석을 했고, 명지산 산행객들을 태운 관광버스는 고속도로를 잘도 달려 오전 10시경 경기 가평 땅, 산행 들머리가 되는 북면 백둔리에 도착했다. 꼬박 5시간 정도 걸린 셈이다.

`가평`이라 하면 사람들은 `남이섬`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그만큼 남이섬은 유명한 곳인데 몇 년 전부터는 일본 관광객들이나 중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고 있다. 필자가 오늘 가는 명지산도 가평에서는 알아주는 관광코스로 가평8경 가운데 제4경으로 치고 있으니 좋은 산이다.

차에서 내려 등산 장비를 갖추고 나서 마을 주변을 살펴보니 자연체험학교와 펜션들이 들어서 있는 정겨운 마을이다. 백둔리 동리이름에서 백둔(栢屯)이란 `잣나무가 많은 계곡`이라는 뜻으로 이곳 사람들은 `잣둔`이라 부른다.

산행 일정은 이곳 백둔리를 출발해서 소망능선으로 해서 연인산을 먼저 오른 뒤에 아재비고개로 해서 명지산에 오르기로 했다. 하산 종착지는 익근리 마을인데 거리상으로는 약 16km이며, 산행 시간을 7시간으로 잡고 있으나 길이 평탄해 시간을 앞당길 수가 있다.

 

▲ 가을 정취가 사라지고 있지만 시원스러운 폭포수가 흘러내리는 명지산 계곡.
▲ 가을 정취가 사라지고 있지만 시원스러운 폭포수가 흘러내리는 명지산 계곡.

참나무·잣나무 군락지 편안한 산행

백둔리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연인산까지는 약 4.8km로 2시간 정도 소요된다. 늦가을의 산골 풍경들을 마음껏 즐기며 길을 걷는다. 오랜만에 호젓한 길을 걸으니 기분이 상쾌한데, 지난주까지 바빴던 일상의 피로를 말끔히 풀 수 있는 등산이어서 시작 길부터 마음이 홀가분하다.

소망능선을 오르며 주변을 살펴보니 멀리 가까이서 산들이 들이 연속적으로 펼쳐진다. 가을단풍들이 지고난 산은 차분한 인상을 준다. 능선을 타고 올라도 연인산으로 가는 길은 참나무, 잣나무 군락지가 편안한 느낌을 준다. 마지막 부분이 조금 힘들뿐 쉽게 오를 수 있는 산이다.

연인산 정상에 올랐다. 시계를 보니 11시 30분이다. 잠시 쉬면서 이곳 유래에 대해 자료지를 보면서 생각해본다. 이 산은 원래 명지산 가운데 이름 없는 무명봉이었는데, 우목봉으로 불리다가 1999년 가평군에서 산을 개발하면서 연인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정상에서 쉬면서 서쪽 편 우정봉 능선을 보고, 멀리 아재비고개 너머 명지산과 그 뒤편으로 이어지는 산들을 바라본다.

다시 하산을 시작해 아재비고개로 향한다. 능선을 타고 원시림과 수풀사이로 난 작은 오솔길 같은 길을 이리저리 구비 틀면서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걷기가 편한 길이니 힘든 줄 몰라 필자는 속도를 내어본다.

 

그 길을 1시간정도 걸어가 아재비고개에 도착했고, 연인산에서 하산해 3,3km를 걸어왔다. 그런데도 멀지 않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주변의 숲길이 편안해서다. 고개에는 등산 온 사람들이 몇 명이 모여 휴식하면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아재비고개는 섬뜩한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배가 고파 아이들을 잡아먹었다는 이야기인데, 이는 옛날 가평 산골에 살던 화전민들의 고달픈 삶이 과장돼서 고갯길에 전설로 서린 것이다. 표지안내판을 보니 여기서 연인산이 3.3km, 앞으로 가야할 명지산도 3.3km이니 연인산과 명지산의 딱 중간지점에 아재비산이 있는 것이다.

아재비고개에서 지나온 연인산 능선을 보니 하나의 고운 선으로 펼쳐진다. 오른쪽 산 아래에는 명지산 군립공원이고, 진행해야 할 앞 방향을 보니 명지산 가운데 명지3봉이 보인다. 다시 출발해서 평탄한 길을 이어가 1.6km 정도 가니 오름길이 시작된다. 때로는 계단을 타고 오르내리다가 명지3봉 아래에서는 가파르게 산을 오른다.

명지3봉 정상에는 바위들이 많다. 여기서 보이는 상판리 마을너머 운악산 모습이 또렷하다. 800m 앞에 서있는 제2봉을 향해 길을 걷는다.

주말이라 등산객이 자주 보이는데, 명지산 1봉과 2봉을 올랐다가 3봉으로 내려서는 산행객 일행들이 즐거운 표정으로 대화하면서 내려온다.

2봉에 도착해 사진만 몇장 찍고서는 서둘러 명지산 제1봉, 정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가면서 보니 명지봉이 저 앞에 우뚝 솟아 늠름하게 서 있다. 정상으로 가는 길가에 많이 보이는

자작나무와 구상나무들을 보고 명지산에 도착하니 오후 2시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 명지산 표지석.
▲ 명지산 표지석.

`생태경관 보전지역` 지정 곤충도 풍부

명지산은 1984년 군립공원으로 지정됐고, 아직도 원시림상태가 잘 보존되어있다. 또 가평은 전국 잣 생산의 40%를 차지하는 지역으로 잣으로 유명한데, 이 산에도 잣나무 군락지를 이루고 있다. 또 자연경관이 수려해 맑은 계곡과 가을단풍이 유명한 산으로 소문나 있는 곳이다.

또 우리나라 생태·경관보전지역 중 여섯 번째로 지정된 곳으로 특히 곤충은 한라산, 지리산 다음으로 풍부한 지역이어서 가평군에서는 명지산 군립공원 입구에 생태탐방학습원을 개관해 각종 약용, 야생화 등 자연학습원과 곤충체험 영상물 등 생태체험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필자는 정상에서 사방을 둘러보다가 휴식 겸 준비해온 과일로 허기를 달랜다. 가을햇살이 따스하기는 마찬가지겠지만 오후에 들어서니 높은 산이라 싸늘한 기운이 감싸고돈다. 늦가을 단풍은 지고 색깔이 바래진 잎들이 가지에 매달려 있지만 그래도 명지산 풍경은 곱다.

지나온 산들과 저 아래 보이는 마을들을 보면서 필자는 평온해진 마음으로 연인산과 가평 8경 중 제4경에 해당하는 명지산을 떠올리면서 시심에 잠겨본다.

`걷기가 마치/ 사랑하는 사람끼리/ 동행하는 길처럼/ 평온한 연인산을 거쳐/ 아재비고개 너머/ 우뚝 서 있는 명지산은/ 명성대로 운치가 있다.// 산 정상에 서면/ 저 멀리 경기의 최고봉,/ 화악산의 기세가 이어져/ 이 곳 산세 역시나/ 늠름하고 빼어나다./ 명지산에 올라 바라보는/ 늦가을 풍경이 정말 곱다.`(자작시 `명지산에 오르다` 전문)

이제 하산해야할 시간이다. 필자는 명지계곡 쪽으로 내려선다. 늦가을등산이나 겨울등산은 하산 시간을 잘 맞춰야한다.

해가 있을 때 산을 완전히 내려서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산행계획을 짜서 시간을 확인하면서 산행해야 한다.

능선 아랫길을 50분 정도 걸어가 삼거리에 당도했다. 직진하면 명지폭포를 지나 익근리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으로 돌면 백둔봉 갈릴길로 해서 백둔리로 가는 길인데, 필자는 계곡으로 내려서서 익근리 방향으로 산행길을 잇는다.

걸어가는 사이사이에 산촌의 민가들이 드문드문 나타난다. 옛날에는 이 일대가 화전민들이 일군 터전이라고 하니 오지중의 오지였는데, 지금은 관광지로 변해 군데군데에 펜션도 있고 관광객들이 찾아오면 숙박할 수 있는 쉼터도 마련해놓고 있다.

 

▲ 연인산 표지석.
▲ 연인산 표지석.

기기묘묘 고목·바위, 산행 곳곳 눈길

늦가을 시골길을 걷자니 가을걷이가 끝난 풍경은 스산하기도 하다. 때로는 한적한 산골길을 걸으며 복잡해진 머릿속을 비우는 것도 등산의 맛 중 하나다. 명지폭포를 지나 익근리계곡을 내려서서 승천사가 있다. 그 절을 지나 주차장에 도착해서 시계를 보니 오후 5시반경이었는데 총 7시간 반이 걸렸고, 연인산 코스는 쉬웠으나 명지산까지 등반 일정이 다소 힘들기도 했다.

오늘 가을단풍이 예쁘다고 소문난 명지산을 늦가을에 찾아오니 단풍은 이미 져버려 멋진 풍경은 보진 못했다. 하지만 명지산의 수십 년 묵은 고목과 바위들의 조화가 어우러진 절경을 마음속에 그려보면서 혼자 산을 타면서 떠올랐던 많은 것들에 대해 감사해한다.

그러면서 얼마 전 산행 자료에서 본 이탈리아 등산가, 기도 레이(1861-1935)를 생각한다. 그는 산에 대해 경건하고 겸허한 태도를 유지한 세계 등산계의 특이한 존재로 알려지고 있다.

`등산을 실천하는 속에는 어려운 산을 기어오르려는 단순한 야심과는 다른 것이 있다. 어떤 정신이 있다 나는 가장 아름다운 정열을 산에 바쳤다.

 

▲ 손경찬/수필가·예술소비운동 본부장
▲ 손경찬/수필가·예술소비운동 본부장

그리고 이 세상에서 받지 못한 보수를 산에서 받았다`

`나는 가장 아름다운 정열을 산에 바쳤고, 이 세상에서 받지 못한 보수를 산에서 받았다`는 유명 산악인의 의미가 있는 말이 필자의 심정과 같으니 그 말을 몇 번이나 새겨본다. 기도 레이의 평범하지만 속속들이 명언처럼 느껴지는 말처럼 필자도 지난 4년간 전국의 여러 산들을 등산하면서 자연에 대해 정말 많이 배웠다.

그리고 어디에서 솟아난지는 모르겠지만 아름다운 정열을 산에 바쳤다는 자부심을 가져본다. 백번 생각을 봐도 이 세상에서 받지 못한 보수를 산에서 받았다는 느낌이 유달리 강하게 전해지는 이 순간이 행복하다. 글·사진= 손경찬/수필가·예술소비운동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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