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참된 주인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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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낭희 수필가

종려수들이 비바람을 맞으며 제주의 아침을 연다. 한라산 등반은 무산되고 홀로 우중의 관음사를 찾기로 마음먹었다. 애초부터 관음사가 목적이었기에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는지 모른다. 한라산의 가슴팍을 향해 난 산간도로도, 관음사의 주차장도 텅 비어 있다. 빗물들이 모여 작은 개울을 방불케 하며 힘차게 흐른다.

거친 빗속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석조대불이나 폭우를 뚫고 달려와 머리를 조아리는 불자의 모습에서 삶의 진지함을 읽는다. 침묵을 공유하며 돌아서는 불자의 얼굴에는 안온함이 어려 있다. 그 한 줌의 희망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리라.

거짓말처럼 비가 온순해졌다. 일주문을 통과하자 잘 뻗은 삼나무와 돌담 아래 수인이나 표정, 입고 있는 가사의 모양이 저마다 다른 현무암 석불들이 일렬로 반긴다. 제주를 상징하는 삼나무와 검은 현무암의 조화로운 풍경이 장관이다. 가지런히 두 손을 모은 채 부처님의 표정을 하나하나 읽으며 걷는다. 이토록 토속적이면서도 이국적인 사찰이 있을까?

관음사를 창건한 사람과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제주의 신화나 전설에 괴남절(제주 방언으로 관음사)이 전해오고 있어, 불교 전래 초기에 창건되었을 거라 추측할 뿐이다. 제주는 한때 `절(寺) 500 당(堂) 500`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불교가 중흥했지만 조선 숙종 때 억불정책으로 모든 사찰은 폐사되고 200년 간 불교와 사찰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1908년 비구니 해월 스님이 복원하였다. 떠돌이 무당이던 해월 스님은 비양도를 가다 풍랑을 만나 사경에 이르렀을 때 관음보살의 신력으로 살아남자, 비구니가 되어 이 절을 짓고 관음사라 명명한다. 그러나 제주반란사건으로 사찰이 전소되어 1968년 중창 후, 지금은 제주 불교의 본산으로 40여 개의 말사를 둔 대가람으로 거듭나고 있다.

나는 가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사천왕문 안으로 펼쳐진 풍경은 그리운 이로부터 날아든 애절한 가을엽서를 한 통을 연상케 한다. 넋을 놓고 있는데 좌측으로 난 오솔길 위에도 은행잎이 쌓여 환상적이다.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목마와 숙녀`가 떠오르고, 시몬을 향해 나뭇잎 져버린 숲으로 가자고 재촉할 뻔 했다. 사찰답지 않은 낭만과 멜랑콜리한 사색을 깔고 관음사의 가을은 깊어가고 있었다.

누구나 크고 작은,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을 안고 살아가지만 그리 후회하거나 억울해 할 필요는 없다. 잠깐의 갈등과 설렘이 주는 느낌은 오랫동안 상상과 그리움이 되어 삶을 풍요롭게 해주기 때문이다. 나는 천왕문을 지나 대웅전을 향해 걷는다. 자욱하게 떨어진 낙엽 위로도, 높다란 석조좌상의 침묵 위로도 하염없이 가을비가 뿌린다.

잘 가꾸어진 나무와 연못, 현무암 석불들의 조화가 마치 야외 전시관을 찾은 기분이다.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듯한 몽환적인 가을날, 문득 팽팽한 긴장감이 밀려든다. 발밑에서 스러지는 낙엽들의 처연한 몸부림, 쉽게 부서지지 않으며 밟혀도 소리 내어 울지 않는 가을날의 절규 같은 무거운 침묵을 감지한다. 빗속에서 담담히 잎을 떨구는 은행나무를 지나고 현무암 자갈이 바스락대는 마당을 지나 대웅전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밀려드는 이 숙연함의 정체는 무엇인가?

 

▲ 제주도 관음사 미륵대불을 호위하는 석불들.<br /><br />
▲ 제주도 관음사 미륵대불을 호위하는 석불들.

4·3사건을 떠올린다. 역사 속의 아픔을 더러는 외면하고 더러는 무지로 인해 놓치며 살아왔다. 고통 따위는 기억의 저편으로 흘려보내려는 미욱한 습성을 반성하며 안일함을 추구하는 나를 돌아본다. 때마침 스피커에서 `명상의 말씀`이 경내를 흐른다. 어떠한 상처도 치유될 것만 같다. 새살이 돋듯 모든 사람의 마음에도 불심으로 가득 채워질 것만 같다. 서둘러 대웅전 법당에 들러 석가모니불 앞에서 제주의 아픈 원혼을 위해 잠시지만 기도한다.

짧은 역사를 말해 주듯 전각들은 정갈하고 소박하지만 무언가 신비로운 기운이 감돈다. 언덕 위에 보이는 미륵대불을 향해 걷는데 삽시간에 안개가 모든 것을 집어 삼킨다. 석가모니불이 열반에 든 뒤 56억7천만년이 지나면 사바세계에 출현하여 모든 중생을 교화한다는 부처님, 황금빛 미륵대불이 저만큼 베일에 가려 사라진다.

크고 웅장한 미륵대불, 그 뒤로 어렴풋이 드러나는 검은 실루엣들, 삽시간에 내 몸은 경직되어 꼼짝할 수가 없다. 낯선 세계에 홀로 갇혀 서성대는 이방인의 막막함과 두려움 같은 공포가 엄습한다. 수많은 석불들이 온전히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나의 심장은 뛰지 않았다. 그 섬찟한 무서움의 근원에서 내 영혼은 낯설고 초라하게 떨고만 있다.

제주인의 염원과 응집력이 담긴 석불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옅은 미소를 띠며 다가온다. 나는 한참을 지나서야 안정을 찾는다. 습한 기후 때문인지 눈물처럼 번지고 있는 이끼 옷들과 거미줄에 맺힌 빗방울조차 정겹고 친근해진다. 감정의 노예가 되어 천당과 지옥을 오갔던 짧은 순간들이 참으로 허탈하다.

어떠한 일에도 휘둘리지 않는 내 안의 참된 주인은 누구인가? 계절의 정취와 신비로움을 겸비한 관음사가 숙제를 안겨 주며 떠다민다. 일주문으로 향하는 길은 더 이상 침묵하지 않았으며 가을비는 벌써 그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