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날의 대화는 기도처럼

▲ 조낭희<br /><br />수필가
▲ 조낭희 수필가

해인사 진입로는 가을 단풍이 숨넘어갈 듯 절정이다. 금빛 햇살 아래 나뭇잎은 속살을 투명하게 드러낸 채 수줍고도 요염하다. 차는 단풍 터널을 미끄러지듯 달린다. 계절에 충실한 자연으로의 초대는 우리를 겸허하게 만든다. 오늘은 가을 귀빈이 따로 없다.

해인사에는 암자가 많아서 백련암이 어디쯤 숨어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사람들을 따라 걷다가 정갈하게 누워있는 아스팔트길로 접어든다. 포장된 길은 내 인생의 탄탄대로처럼 여겨졌으며, 길은 호젓한 숲으로 이어져 있다. 이 계절에 가슴 벅차지 않은 것이 어디 있을까. 30년 지기와 모처럼 시간을 낸 것을 아는지 가야산 단풍들이 떼 지어 반긴다.

뜻밖에도 백련암 가는 길은 오래도록 한적하다. 꽃이 진 자리마다 신록이 들어서는가 싶더니 이내 숲은 이별을 서두른다. 지치도록 아름다운 한 때를 견디지 못해 숲이 벌인 축제에 우리는 빈손으로 구경 왔다. 길은 점점 가팔라지고 짧은 가을해가 언제 떨어질지도 모를 초행길 앞에서 우리는 느긋하고 여유롭다.

백련암은 해인사의 암자 중 가장 높은 곳에 있다. 예로부터 고승들이 많이 배출된 수도처로 천혜의 경관을 자랑하며 가야산 제일 승지로 꼽혀 왔다. 초창 연대는 정확히 모르고 조선 선조 38년(1605년) 서산대사의 문도인 소암스님이 중창했다. 그 뒤 성철 스님이 가야산 호랑이로 주석하며 해인 총림 초대방장, 조계종 종정을 지내며 법력을 펴다가, 오늘처럼 만산에 홍엽이 지던 날 이곳에서 열반하셨다.

성철 스님을 친견하려면 부처님께 삼천 배를 해야 한다는 전설 같은 일화 때문인지 백련암 찾아가는 길은 멀고도 험할 거라 생각했다. 뜻밖에도 적당히 몸을 푼 우리를 암자는 친근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맞아주었다. 긴 돌계단 위로 백련암 현판을 건 산문이 청명한 가을하늘을 이고 있다. 살짝 일본풍이 느껴지는, 정갈하면서도 도도한 첫 느낌이 여느 암자와는 다르다.

오래 된 나무들이 사천왕을 대신하고 암자 같지 않은 큰 규모와 적막감에 눌려 우리는 경내에 들어서기도 전에 발소리를 낮추고 숨을 죽인다. 길고 높다란 석축 위에 위풍당당한 전각들이 보인다. 부처님 얼굴처럼 생긴 불면석이 마당을 지키며 압도한다. 햇살 가득한 마당에 서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지 잠시 방향을 잃는다. 전시장에 들어온 듯 다양한 나무와 바위들, 게다가 어느 것이 중심전각인지 모르겠다.

고심당에 들러 성철 스님의 좌상 앞에 예를 갖추고 적광전 법당 문을 연다. 젊은 불자 한 분이 열심히 기도 중이다. 조금 높은 곳에 위치한 천태전에서도 비슷한 연배의 불자가 기도 중이다. 계절의 유혹을 뿌리치고 기도 삼매경에 빠져 있는 두 불자는 아무래도 마음이 통하는 벗 같다. 삼천 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누군가와 같은 방향을 함께 걷는 일은 얼마나 행복한가. 나란히 숨을 고르며 백련암을 오른 우리처럼 저들도 무언가를 간절히 염원 중이다. 절에 들어서면 저절로 마음이 비워지고 충만해져 진정한 존재의 뿌리로 살아가기 위해 고민해 왔다. 짧지만 영혼을 깨우기 위해 몰입의 시간도 갖는다. 기도하는 그들의 정성 때문인지 백련암은 가을의 한가운데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의연하다.

 

▲ 해인사 백련암
▲ 해인사 백련암

그런데 오늘은 무언가에 들떠 건성으로 기도를 끝내고 말았다. 배회하듯 절을 서성이는 스스로를 애써 외면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두운 법당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시간을 보내기엔 억울하다. 숨어있던 낭만성이 고삐가 풀리고 감성이 말랑말랑해져 버린 것이다. 다시는 못 볼 것 같은 심정으로 백련암 가을에 빠져든다. 경련을 일으키듯 타오르는 나무들의 오르가슴 속에 숨어 있는 아픔들, 우주의 맥박과 숨결까지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30년을 넘도록 붙어 다니던 지기와의 한나절 여행, 그녀도 나만큼 편안해 보인다. 물질적인 환경이 달라지면서 한동안 우리의 일상과 관심사도 달라졌다. 공통된 화제나 공감의 빈도도 줄어들었으며 작은 오해와 소원함이 밀려들기도 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 걸음씩 물러섰다. 약간의 의무감 같은 어색함을 안고 간간이 만났지만, 그럴 때마다 나의 빈약하고 부실한 내면과 맞닥뜨리며 아파하곤 했다.

오늘은 일상의 자잘한 이야기들이 클래식 소품처럼 녹아들고 별 것 아닌 일에도 가슴이 열린다. 화강암 위에 새겨진, 형체도 불분명한 여래불의 옅은 미소가 떠오르는가 싶더니, 로뎅의 `대성당`이 생각난다. 마주 잡지는 않았지만 각도에 따라 살짝 닿아 있는 것도 같고, 때로는 친밀하게 맞닿아 있는, 영원히 마주보는 두 오른손. 분명 우리는 살아있는 날까지 서로를 응시하며 함께 갈 것이다.

가을이 우리의 대화를 기도처럼 부드럽고 충만케 해 주었다. 햇살이 바래지면 이내 소슬바람이 불고, 숲은 다시 긴 침묵 속으로 빠져드리라. 그러나 봄이 온다는 것을 알기에 긴 겨울의 아픔을 견뎌 내고 기다릴 줄도 안다. 세월만큼 스스로를 낮추고 성숙하게 하는 선물이 또 있을까? 둘이서 백련암을 내려오는데 하늘에 낮달이 홀로 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