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랑하고 싶은 날에는

▲ 조낭희<br /><br />수필가
▲ 조낭희 수필가

앞산이라는 이름에는 친구처럼 편한 정겨움이 숨어 있다. 은적사가 있는 앞산은 비슬산, 대덕산, 최정산이라는 명칭이 있지만 사람들은 앞산이라 부르기를 좋아한다. 옛날에는 남쪽을 `앞`이라 했기에 `남쪽에 있는 산`이란 뜻에서 앞산이라 부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큰골로 향하는 구길은 순환도로가 나면서 점차 잊혀져 가고 있다. 봄기운에 취해 나풀거리는 벚꽃들의 향연이 슬프도록 그리운 날이나, 새로 난 도로가 통행량으로 몸살을 앓을 때, 나는 이 길을 떠올릴 뿐이다. 옛 친구를 만난 듯 가슴이 따뜻해져 오지만 자주 찾지 못하는 것은 마음에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언젠가 앞산 자락길을 걷다 우연히 은적사를 만났다. 먼발치에서 대웅전을 올려다보고 자목련을 배경으로 사진 한 장을 찍고 돌아왔을 뿐이다. 산허리를 감고 도는 오솔길에 잘 어울리는 아담하고 정갈한 사찰이었다. 아름드리 참나무와 소나무들이 도시의 매연과 소음을 차단해 주어, 절은 깊은 산중에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은적사는 926년(경애왕 3년)에 창건된 유서 깊은 고찰이다.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침공하여 국운이 위태롭자 경애왕은 고려 왕건에게 도움을 청한다. 왕건은 구원병을 이끌고 달구벌(대구)에 입성하지만 공산 전투에서 견훤에게 대패하고 만다. 명장 신숭겸의 지략으로 구사일생 비슬산으로 피신한 왕건은 이곳 굴에서 3일간 숨어 지낸다. 짙은 안개와 거미들이 동굴 입구에 줄을 쳐주어 안전하게 피신했던 그가 왕 위에 오르자, 고승 영조대사에게 명하여 이곳에 사찰을 건립하고 자신이 숨어 생명을 건진 곳이라 하여 숨을 은(隱)자, 자취 적(跡)자를 써 은적사로 명명하였다.

오늘은 자락길 대신 큰골의 포장된 도로를 택했다. 화창한 시월의 오후, 나는 결 고운 햇살이거나 단풍이 들어가는 벚나무 잎이 되어 걷는다. 사박사박 발밑에서 햇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눈길 닿는 곳마다 안온하고 평화롭다. 그런데 도둑고양이처럼 엄습하는 이 초조함의 정체는 무엇일까?

나의 청춘은 부서지고 없는데 길은 저 홀로 옛날을 기억하며 살아가고 있다. 휴게소 매점에서는 퉁퉁 불은 어묵이 손님을 기다리고, 반가운 친구라도 만난 듯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오래된 가요가 마중을 나온다. 세월 속에서도 늙지 않는 풍경들이 마음을 적신다. 아이의 재롱을 사진에 담는 젊은 부부의 환한 이마가 예뻐 보이고, 도토리를 찾아 헤매는 다람쥐의 불안한 눈빛까지도 아름답다.

 

▲ 대구 비슬산 은적사
▲ 대구 비슬산 은적사

세상은 변화를 찾아 늘 쫓기듯 바쁘다. 도태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 새로 난 도로 위를 질주하는 차들의 소리가 아우성처럼 들린다. 젊은 날엔 나도 무리 속에서 존재감을 키우며 살아 왔다. 느긋한 여유는 권태롭게 느껴졌으며 삶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여겼다.

나이가 들면서 내 안의 소리를 듣는 기회가 잦아졌다. 사람들과 적당히 거리를 두고 홀로 있는 시간을 가지면, 자신을 좀 더 정확히 바라볼 수 있다.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아는 사람보다 조금 더 내려놓을 줄 알고, 배려할 줄 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산란기에 접어든 연어가 강물을 거슬러 오르듯, 남은 시간은 낮고 겸허한 세계에서 유영하고 싶다.

가파른 길 위에서 은적사가 기다린다. 봄날 한 철 화사하던 자목련은 핼쑥한데, 보랏빛 국화는 유난히 향이 깊고 싱싱하다. 비바람과 천둥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꿈을 키워온 영광의 결실이다. 내게 다시 청춘이 주어진다면 후회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삶은 상실의 아픔이 따른다는 것을 이미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커다란 파초 잎사귀를 타고 놀던 햇살과의 조우 앞에서, 나는 숨을 죽이고 산사의 오후에 빠져드는데 친구는 거침없이 대웅전으로 향한다. 108 염주를 손에 걸고 아주 천천히 절을 시작한다. 기도하는 모습만큼 성스럽고 가슴 뭉클한 풍경이 있을까. 그녀는 순간순간 108송이 꽃으로 태어나고 있는 중이다. 정성을 다하는, 가냘픈 새의 날갯죽지 같은 그녀의 몸짓에서 나는 인생을 읽는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삶에는 사막이 있고, 오아시스도 있다. 바람이 어느 곳에서 불어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순풍 속에서 자기를 낮출 줄 알고 역풍 속에서는 의연하게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무념으로 절을 하는 이 시간, 모든 번뇌는 사라지고 아픔은 승화되지 않을까. 그녀 곁에서 나도 조용히 절을 한다.

이국의 처마 밑에서 존재감을 잃지 않고 꿈을 키우는 파초의 생명력을 바라보며 대웅전 댓돌에 앉아 땀을 식힌다. 나를 나답게 이끌어주는 힘의 원천은 따뜻한 감동과 경이로움이다. 상투적인 만남의 지속성이 주는 무의미함이나 냉정함이 감도는 대화에서 벗어나고 싶다. 낮은 바람에도 풀잎이 흔들리듯 건강하고 따뜻한 감수성을 유지할 수 있다면 좋겠다.

삶이 공허하거나 허기감이 일 때, 나는 가벼운 차림으로 앞산을 오르리라. 낙엽이 지는 소리, 나뭇잎 사이로 비쳐드는 햇살의 몸짓, 바람이 까치발로 개울을 건너며 들려주는 이야기를 경청하다 보면, 제대로 나를 사랑하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