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철화 문학평론가

나는 둘째다. 위로 형을 두었다. 그래서인지 먹고 입을 것 가리지 않고 부족하던 내 유년 시절 단 한 번도 새 옷을 입지 못 했다. 세 살 터울의 형이 입던 옷을 물려받아야만 했던 것이다. 혹시 아래로 남동생이 있었다면, 그에게 물려줄 가능성 때문에라도 그나마 어쩌다 하나 쯤 새 옷을 차지할 수 있었을 테지만 불행하게도 여동생만 둘을 두었다.

어릴 때, 그게 늘 불만이었다. 똑 같은 아들인데, 왜 나는 매번 형의 헌옷을 물려받아야만 하나? 장손에다 체격이 좋았던 형의 옷은 깡마른 내게는 잘 맞지도 않았고, 옷감의 질이 좋지 않을 때라 온전하지도 않았다. 손재주가 좋은 어머니 탓(?)에 수선을 거친 옷은 얼추 모양을 갖추었지만, 안에는 늘 기운 흔적이 남아 있었다. 양말마저 꿰매어 신고 다니던 때이긴 했지만, 그래도 나는 정말 간절하게 새옷을 입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는 방 셋에 열 식구 넘게 사는 대가족이었다. 10남매의 장남으로 말단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의 월급으로는 한달 치 쌀을 사는 게 고작이었다. 재봉질부터 시작해서 안 한 게 없는 억척스런 어머니의 노력으로 배를 안 곯는 게 다행이었다. 새옷 타령은 입 밖으로 꺼내놓을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린 게 참아봐야 한계가 있다. 초등학교 3학년 무렵이었다. 어느 날인가 나는 그 간절한 바람을 아버지에게 털어놓았다. 아니 어쩌면 간파 당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무서운 아버지가 바람 차가워지는 계절이 오면 좋은 선물을 해주마고 약속을 한 것이다. 나는 그게 바로 따뜻한 코트나 멋진 색깔의 바지일 것으로 생각했다. 늘 새 옷을 입고 와서는 속을 긁어놓는 사촌동생의 코를 납작하게 해줄 그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런데 옷은 없었다. 아니 아무 것도 없었다. 있었다면, 완연한 가을날, 나와 여동생 둘을 데리고 아버지가 긴 산책을 나선 것이 전부다. 선물을 주겠다는 말에 끌려 마을을 지나고, 언덕을 넘고, 산골짜기를 지나 알 수 없는 먼 곳까지 걸어갔다가 돌아온 게 다였다. 어린 여동생 둘은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자마자 거의 기절하듯 쓰러졌다. 나 역시 마음이 무너지며 몸까지 무너져 내렸지만, 너무 억울해서 잠을 못 이루고 뒤척였다.

그때 아버지가 곁으로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넌 아직 어려서 모르겠지만, 어른이 되면 오늘 걸은 게 평생 좋은 선물이 될 거다.”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이 말만 안 들었어도! 아버지가 무섭지만 않았다면, 소리 지르며 원망을 내뱉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소리 죽여 울기만 했다. 그래서 더 억울했고, 지금도 그날의 환멸이 잊히질 않는다. 나는 그때 복수하듯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어른이 되면, 옷도 사주지 못 하는 무능한 아버지는 절대 되지 않을 거야!”

내 기억에 처음으로 새 옷을 입은 것은 초등학교 6학년 가을 무렵이다. 지금도 그 바지를 입고 기뻐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하지만 그 옷은 금방 사라졌다. 중학교에 진학하며 시커먼 교복을 입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도 거의 유일한 습관으로 시간만 나면 걷는다. 특히 마음이 어지럽고, 사는 게 쉽지 않을 때는 걷는 것 이상의 위안과 해결책이 없다. 그렇다고 그날 힘들게 걸은 일이 아버지의 말처럼 꼭 좋은 선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가난한 아버지의 자기 위안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걷기 습관을 아직 갖고 있다. 그리고 이번 가을에도 만산홍엽(滿山紅葉)과 반가이 만나며 산에 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