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자 연극 `길 떠나기 좋은 날`서 한 가족의 기쁨과 슬픔 펼쳐내

“저는 작품이 주는 영향을 굉장히 많이 생각해요. 내 역할을 통해서 아무리 힘든 상황에 있는 사람이라도 실낱같은 희망을 봤으면좋겠다는 마음으로 작품을 골라요.”

`국민 배우` 김혜자는 작품을 까다롭게 고르기로 유명하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 기준은 단순하다. 보는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가 이번에 선택한 작품은 연극 `길 떠나기 좋은 날`이다.

축구가 전부였으나 다리 부상으로 선수 생명이 끝나면서 절망에 빠진 남자 `서진`과 그를 사랑으로 품어 희망을 준 여자 `소정`, 부부가 된 두 사람의 딸 `고은` 등 한 가족의 기쁨과 슬픔이 현실과 환상, 현재와 과거를 교차하며 펼쳐지는 작품이다.

김혜자는 여기서 불치병에 걸려서도 좌절하지 않는 아내이자 엄마인 `소정`역을 소화한다. 한국 뮤지컬 대상에서 남우주연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송용태가 남편 `서진` 역으로 30여년 만에 연극 무대로 복귀하고, 방송과 영화에서 얼굴을 알린 임예원이 딸 `고은` 역할을 맡는다.

김혜자는 12일 이화여고 100주년기념관 화암홀에서 열린 제작발표회에서 “죽는 역할이든 못되게 구는 역할이든, 작품이 곧든 험하든, 뭔가 힘든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그 드라마, 연극을 보면서 어딘가 빛이 조금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있으면 좋겠다는 것을 꼭 염두에 두고 작품을 선택한다”며 이번 작품은 “아름답고 고운, 이 시대에 하나쯤은 있었으면 싶은 연극”이라고 말했다.

특히 이번 연극은 대본과 연출을 맡은 하상길이 처음부터 김혜자를 염두에 두고쓴 작품이다.

46년 전인 1969년 연극학도였던 하상길은 연극 `유다여 닭이 울기 전에`에 출연한 김혜자의 연기를 보고 감동한 이후 지금까지 이 여배우의 팬으로 살아왔다. 김혜자의 모든 연극을 다 봤고, 그 배역 이름까지 외울 정도다.

1988년 `극단 로뎀`을 창단한 하 연출은 3년 후인 1991년 `우리의 브로드웨이 마마`를 통해 무대를 떠나 브라운관에서 활동했던 김혜자를 거의 20년 만에 연극으로 다시 `초대`한다. 10년 후인 2001년 모노드라마 `셜리 발렌타인`으로 다시 한번 김혜자와 만났고 이번에 세 번째로 호흡을 맞춘다.

하 연출은 “김혜자를 위한 작품을 쓰고 싶었다. 이 작품은 처음 쓸 때부터 김혜자를 생각하고 쓴 것이다. 대사의 리듬이 그에게 가장 잘 맞도록 썼다”고 설명했다.

김혜자는 몇 번의 고사와 오랜 고심 끝에 이번 작품의 출연을 결정했다. 하 연출은 처음 대본을 건넸을 때는 구성이 좀 탄탄하지 못했다며 김혜자가 처음 고사한 이후 다섯 번 정도 다시 고쳐 썼다고 했다.

김혜자는 “사람들이 제게 `나이 먹어도 소녀 같다`는 이야기를 잘하는데 처음 대본을 받았을 때는 `잘못하면 소녀 같은 면만 부각되겠구나` 싶어서 좀 많이 생각했다”고 했다.

“대답을 안 하고 있다가 모노극 `오스카! 신에게 보내는 편지`를 먼저 했어요. 그동안 많이 고친 대본을 갖고 몇 달 전에 다시 이야기를 했는데, `연극은 오스카로 끝내고 그만하고 싶다`고 했더니 굉장히 슬퍼하셨어요. 저도 많이 생각하고 (대본도) 많이 고쳐서 이제는 제가 잘할 일만 남았죠.”

이번 작품은 `우리말을 아름답게 표현한 연극`을 표방한다.

하 연출은 “사실적인 드라마라기보다는 동화적 요소가 강한 `시극`에 가깝다”며“아름답고 조용하고 서러운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김혜자는 “우리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인데, 한가지 조심할 점은 아름다운 말을 자꾸 하다 보면 실생활 대화 같지가 않다는 것”이라며 “대단히 아름다운 말이지만 살아있는 사람, 밥하고 빨래하는 엄마의 대사로 해야 하고, 시적인 대사를 시처럼 표현하면 안 되는 것이 참 힘들다”고 말했다. “`소정`이라는 인물은 소녀와 엄마의 모습이 다 필요해요. 그런데 어떤 것이 더두드러지면 안 될 것 같아서 굉장히 조심해 가면서 하고 있어요.”

하 연출은 “이 작품이 사람들을 정서적으로 맑게 치유할 수 있기를 바란다”며 “공연을 보고 돌아가는 길에 그저 동행의 손을 꼭 잡고 갈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