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민건대구대 교수·영어교육과
“그들은 낙원을 이루어 간다는 착각을 가졌다. 설혹 낙원을 건설한다고 해도 그것은 그들의 것이지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나는 했다. 낙원으로 들어가는 문의 열쇠를 우리에게는 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를 낙원 밖, 썩어가는 쓰레기더미 옆에 내동댕이쳐 둘 것이다”라고 조세희는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에서 1975년의 대한민국의 풍경을 이야기 했었다. 한 소설가의 말이 2015년 이 가을에도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최근 학교폭력과 관련한 사건들이 난무한다. 언론은 선정적인 문구를 내세워 학교 폭력의 심각성을 운운하지만 정작 기성세대들은 먹고 살기 힘들다는 이유를 들어 자본으로 끊임없이 아이들에 대한 기대치를 대체하고 있다. 학교 안에서 소통은 이미 물 건너간 일이다. 잘 사는 부모를 가진 아이들에게 학교는 그저 놀이터처럼 친구를 만나는 공간으로 전락하고 있으며, 가난한 부모의 아이들은 학교에서 절망을 배운다. 어른이 만들어 놓은 `자본의 감옥`에서 학교의 순기능을 말한다는 것이 이율배반처럼 보인다.

`감시의 공간`이 된 학교 안에서 아이들은 자연스레 그 감시의 시선을 피해 탈출을 꿈꾼다. 부모의 욕망에 아이들은 움츠러들고, 소통이 부재한 이들은 타인에게 가하는 물리적 정신적 폭력이 그저 장난스러워 보인다. 교육과 사회의 불일치가 이들을 `밥값도 못하는 버러지`로 만들고 있다. 성적 경쟁에서 살아남아 주기를 바라는 기성세대는 이 경쟁에서 일찌감치 포기하고 물러난 이들의 일상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들의 밥버러지 인생은 제 할 일을 다 하지 못하고 밥만 축내는 눈에 가시처럼 보이기도 한다.

“난 이 이야기를 고등학교를 떠나던 그날부터 시작하고 싶다….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건전한 사고방식을 가진 훌륭한 아이들이라고는 본 적이 없다. 어쩌면 한 두 명 정도는 있을 지도 모른다. 많아야 그 정도 일 것이고, 그나마 이 학교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훌륭한 학생이었을 테지”(제롬 데이비드 셀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라고 시작하는 어느 소설의 사연처럼 이미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부모의 계급에 의해 서열화 되어 학교에 들어온다.

철저한 감시와 처벌에 의해 양육된 아이들은, 어린 시절 읽었던 아름다운 동화와 영웅들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희생과 타인에 대한 배려가 현실 밖의 이야기임을 이미 알고 있다.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소통, 사랑, 창의적 인간 따위의 허울 좋은 교실의 액자 속 교훈들은 그저 편의점에 진열된 상품처럼 보인다.

얼마전 시간에 맞춰 해야 하는 일 때문에 식사시간을 놓치고 늦은 밥상을 마주하고 밥을 꾸역꾸역 먹다가, 밥값은 하고 살아야지 하면서 열심히 숟가락질을 해대는 나를 본다. 허겁지겁 밥을 먹다가 문득 내가 밥값은 하고 살고 있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먹는 끼니인데 한 끼 굶는다고 무슨 일이 생기나 싶다가도, 때를 놓치면 식욕의 욕구가 차오른다. 강의와 논문에 치이고 살고 있는 듯 하면서도 할 것 다하고 살고 있는 내 모습이 참 밥버러지 같아 보인다.

요즘의 학교는 학생들에게 최소한의 본능적 욕구마저도 차단한 것 처럼 보인다. 이른 아침과 늦은 밤까지 학교와 사교육 현장에서 이들의 생활은 뻔하다. 부모가 차려 주어야 할 따뜻한 밥은 애시 당초 기대하기 힘들다. 이른 아침 등교시간을 맞추기 위해 애써 차려 준 밥상은 그저 바라만 보아야 할 전시품이 될 뿐이다.

학교를 빠져나와 늦은 밤 학원으로 가는 아이들의 주린 배를 채우는 것은 편의점의 인스턴트 식품이고 밥버러지보다 못한 삶이 이들에게는 숙명처럼 여겨진다. 이런 상황에서 주변의 동료나 친구를 돌아보고 챙기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런 이들이 미래의 꿈을 꾼다는 것은 비대해지는 몸만큼이나 무겁다. 이 아이들처럼 학교 안에 갇혀 애써 이들을 외면하고 자위하는 내 모습에서 `나는 밥값은 제대로 하며 살고는 있는가? 혹 내가 밥버러지가 돼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씁쓸한 자책을 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숟가락을 놓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