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br /><br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학부

“순천에서 인물자랑 하지 말고, 여수에서 돈 자랑 하지 말고, 벌교에서 힘자랑 하지마라!”는 옛말이 있다.

나는 그것을 조정래의 `태백산맥`에서 읽었다. 젊어서 마주한 이 말의 함의를 깨닫게 된 것은 나중 일이다. 세 지역의 특성을 설파한 것이 아니라, 세상 어디가나 몸과 마음을 낮추라는 경구(警句)로 읽으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경험 일천할 때는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법.

여기저기서 깨지고 혼나고 세상살이 이치 조금씩 배우면서 아하, 그런 말이었네 한다. 나는 그것을 단출하게 줄인다. “강호(江湖)에는 고수가 많다!” 인간의 견문이 좁고 제주장이 강하면 세상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세상의 중심에 자기가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중세의 천동설을 떠올리면 충분하다. 우주의 한 모퉁이, 은하계의 변방에 미미하게 자리한 태양계의 혹성을 하늘의 중심으로 보았으니 말이다.

얼마 전에 한옥(韓屋)을 30년 지었다는 대목(大木)을 만났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신축가옥에 물이 새는 문제에 이르렀다.“큰 나무가 제자리를 잡으면 작은 나무가 그 뒤를 따르고, 따라서 비 샐 일 없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었다. 고로 비가 샌다는 것은 애초에 기둥이나 들보가 온전하게 제자리를 집지 못한 탓이라는 얘기다. 명쾌하고 설득력 있는 설명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역시 고수는 다르구먼!`

이런 고수는 일상에 깊이 침윤하여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그들은 말이 아니라, 집으로 말한다. 농부가 곡물이나 청과로, 어부가 어물로 말하는 것과 매한가지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청나라 말기의 명신 증국번이 떠올랐다.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한 인물로 역대 청나라 조정에서 최강최고의 실권을 틀어쥐었던 한인(漢人)이 증국번이다. 자희태후(서태후)의 서슬을 용케 피해 고종명한 증국번.

그가 철없던 아우 증국전에게 보낸 칠언고시가 생각난 것이다. “左列鐘銘右謗書 人間隨處有乘除 低頭一拜屠羊說 萬事浮雲過太虛. 좌열종명우방서 인간수처유승제 저두일배도양열 만사부운과태허.” 거칠게 옮겨보면 “왼쪽에는 공적조서가 오른쪽에는 비방하는 서책이 빼곡 하네. 인생 굽이굽이에는 좋은 일과 궂은 일이 있는 법. 머리 숙여 도양열에게 절해야 할 것이다. 세상만사 뜬구름처럼 허공(우주)을 지나갈 터이니!” 이런 정도 뜻이다.

막강한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언제나 조심스럽게 운신한 증국번은 중국역사에 길이 이름자를 남긴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태평천국`의 신도들에게 그는 만고(萬古)의 역적이겠지만 말이다.

세 번째 행에 나오는 `도양열`은 실존 인물이라기보다는 `장자`의 `잡편` 양왕(讓王)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는 허다한 공적을 세웠으나 끝내 왕의 부름을 받들지 않고 자신의 본업에 충실했다.

요즘 세상에 작은 공을 부풀리지 않는 사람, 자기과시(自己誇示)에 열을 올리지 않는 사람, 어디서 불러주지나 않을까 줄을 대고자 하지 않는 사람 만나기 어렵다. 누구나 이름자 날리고 권력 잡아 한밑천 두둑이 챙기고자 혈안(血眼)이다. 그들은 공적조서는 보잘 것 없지만, 비방문서는 넘쳐난다는 것은 모른다. 그래서 세상 모든 일의 중심에 자신이 자리한다는 착각(錯覺) 속에서 오늘도 분망하다.

그들이 양(羊)이나 잡는 하찮은 인간에게 절하는 법은 없다. 왜냐하면 목숨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인간은 아무리 잘 지은 집에 살아도 내면으로 물이 새는 법이다. 안에서 새는 쪽박이 밖으로 나간들 뾰족한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나는 자경(自警)하는 의미로 증국번의 칠언고시를 읽는다. 거기 의미를 더해준 고수가 한옥을 짓는다는 대목이었다.

나이 먹을수록 주변 사람을 비방하고, 자신을 추어대는 지식인이 너무 많다. 대문짝만한 자신의 허물은 보지 못하고 깨알 같은 남의 허물은 기막히게 들춰내는 인간들이 득시글거리는 사회는 건강하지 않다. 설령 그런 자가 비판적이고 견실한 지식인이라 할지라도 쓰임새보다는 해로움이 훨씬 많은 법이다.

이런 세파(世波)에 묵묵히 제길 가는 강호의 뭇 고수들이 새삼 고마운 것이다. `강호에는 고수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