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기획탐사
다시 형산강에서…
(12) 형산강 지류의 맏형, 기계천

▲ 경주시 강동면 인비리 기계천과 형산강 합류지점

▲ 김규형<br /><br />사진작가
▲ 김규형 사진작가
형산강의 수많은 지류 중에서 기계천(杞溪川)이 가지고 있는 스펙트럼은 여느 지류 보다 다채롭고 두텁다. 포항시 북구 기북면 성법리의 비학산 안새알에서 발원한 기계천은 작은 세류를 형성한 후 은천지를 거쳐 31번 국도를 따라 흐른다. 전체 길이는 32km로 형산강 지류 중에서 가 가장 길다. 기계천은 본류와 대부분의 지류들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것에 반해 위도상으로 북쪽에서 발원해 남쪽으로 흐른다. 이어 내단천을 거쳐 경주시 강동면 인동리에서 본류와 합류하여 남류하는 지리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본류와 합류까지 포항과 경주를 넘나들며 굽이 굽이 옛부터 행정구역을 가르는 기준이 되기도 했었다.

비학산 안새알서 발원, 31번국도 따라 포항·경주 넘나들며 흘러
인비리 고인돌·여강이씨 덕동마을 등 다양한 역사가 고스란히

□ 기계천 제일의 풍광을 품다

어느 한 곳 한 시대의 유물과 역사적 사건의 현장이 아닌 곳이 없는 형산강이지만 기계천은 그 역사적 사건과 유물의 상세 목록이 다른 지류들보다 넓고 다채롭다. 멀리 고대의 선사시대 유물에서부터 현대사의 뜨거운 현장의 중심이 되기도 했었던 곳이 바로 기계천이다. 일찍부터 기계천 유역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들어와 살았다는 것은 기계천이 품은 넉넉한 자연적인 조건이며, 풍광들을 만들어 두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연적인 조건이 있으니 당연히 사람이 모여 들었을 것이고 그 사람들 중에 역사적인 인물들의 자취가 남는 것은 당연하다. 기계천 하면 떠올릴 수 있는 첫번째 인물이라면 당연히 조선의 대유학자인 회재(晦齋) 이언적이다. 회재는 기계천이 내려다보이는 양동마을과 그 인연이 가장 크고 그의 동생 농재(聾齋) 이언괄의 4대손인 이강이 거처를 정했던 덕동마을과도 그 인연의 끈이 있다고 하겠다. 덕동마을은 농재가 그 거처를 정하고 360여년간 대를 이어 살면서 여강이씨 집성촌을 형성한 곳이다. 그 세월동안 덕동마을은 옛 자취들이 고스란히 남아 주변 풍광과 함께 기계천 일대의 가장 아름다운 곳을 만들었다. 기계천과 나란히 하면서 이어지는 921번 도로를 따라 내려오다보면 좌측으로 비학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소담하게 앉은 덕동마을이 나온다. 마을에는 `용계정`, `여연당`, `사우정` 등의 고택들이 옛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여기에 마을앞을 흐르는 기계천을 따라 형성된 `덕동마을숲`이 자리하고 있어 물과 숲과 고택이 절묘하게 어울려 있다.

▲ 기계면 문성리가 새마을운동 발상지임을 알리는 조형물.
▲ 기계면 문성리가 새마을운동 발상지임을 알리는 조형물.

□ 신라유적 못지 않은 고인돌 유적

형산강 유역의 유적은 당연히 신라 1천여년의 시간이 그 중심일 것이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선사시대의 고인돌이 도처에 산재하고 있으며, 기계천 또한 여느 지류 못지 않은 고인돌을 품고 있다. 규모에 있어서도 뒤지지 않지만 중요도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고인돌은 천재지변으로 인한 함몰과 파괴의 세월을 겪어 왔으며 다른 유적에 비해 그 중요성이 무시되어 제대로 된 관리를 받지 못했었다. 여기에 고인돌이 평지나 논밭에 위치하고 있는 경우는 장애가 된다는 이유로 위치가 옮겨지거나 파손되기도 했으며, 그저 평범한 바위로 취급받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수난의 역사를 겪어 온 고인돌 중에서도 기계천 일대의 고인돌은 그나마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다.

921번도로와 31번국도가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 인비리 고인돌은 고인돌에 돌검 모양의 암각화가 새겨져 있다. 인비리 암각화 고인돌은 본래의 위치에서 벗어나 옮겨져 있는데 위치를 이동하게 되면서 하늘로 향하고 있던 돌검의 모양이 가로 방향으로 향하게 세워져 있다. 우리나라 고인돌 중에서 석검이 그려진 고인돌은 여수 오림동에 있는 암각화와 이곳 인비리 암각화가 유일하다. 고대사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는 소중한 유물이 보호시설 없이 방치되고 있는 사실이 안타깝다. 수차례에 걸쳐서 이 곳을 답사하고 있지만 제대로된 보호시설이 없이 그저 방치되고 있을 뿐이었다. 최근의 답사에서는 그나마 있던 안내판도 쓰러져 인비리 암각화 고인돌의 처지를 대변하고 있었다.

형산강 유역의 수백기에 달하는 고인돌 중에서 가장 아름다우며 그 규모도 상당한 고인돌은 기계천 동편 인비리 마을 입구에 있는 고인돌이다. 인비리 일대는 개석식과 기반식 고인돌이 군집을 이루고 있는데 커다란 나무에 기대어 늠름하게 서 있는 고인돌의 모습이 장엄하며 독특한 모습을 띠고 있다.

▲ 자연과 고택이 잘 어우러져 기계천 제일의 풍광을 자랑하는 덕동마을.
▲ 자연과 고택이 잘 어우러져 기계천 제일의 풍광을 자랑하는 덕동마을.

□ 새마을운동의 뿌리

선사시대와 조선시대의 유적을 품은 기계천은 문성리에 이르러 현대사의 커다란 족적을 남긴 새마을운동의 발상지로서 그 자취를 남긴다. 비록 청도군 신도리와 함께 새마을운동 발상지를 놓고서 갈등이 적지 않았지만, 분명한 것은 문성리가 1972년 새마을가꾸기사업이 새마을운동으로 확장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최초의 성공사례로 평가됐다는 점이다. 그만큼 문성리가 새마을운동 모범마을로서 역할과 위상을 가진다는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이는 당시 한꺼번에 훈포장과 대통령 마을표청을 받은 이력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고 하겠다.

지금이야 그 규모가 많이 축소되거나 폐지되었지만 인근에서 가장 활기찬 장터를 꼽으라면 당연히 기계장터다. 오일장으로 열리는 기계장터는 기계천변의 농지와 과수원에서 출하된 계절별 특산물이 유명한 곳이다. 기계오일장은 현내리에서 열리는 오일장으로 약 250년 전부터 장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비록 다른 장보다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다른 지역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장터풍경과 분위기가 느껴지는 곳이다. 또한 청록파 시인 박목월의 시 `기계장날`의 배경이 되는 곳으로 시인이 초창기 기계농협에 근무할 당시 지은 시라고 한다.

□ 아픈 현대사와 함께

성계리를 지나면서 기계천은 경주시 강동면으로 행정구역을 바꾼다. 멀리 어래산을 우측으로 끼고서 드넓은 안강평야를 가로지른다. 이곳에서 기계천은 현대사의 굴곡진 현장에 다시 한 번 등장하게 된다. 바로 `경주 기계천 미군폭격 사건`이다.

이는 6·25 전쟁이 발발했던 1950년 8월 경주시 강동면 안계리 기계천 일대에서 발생한 미군폭격에 의한 피난민 집단 사망사건이다. 이 사건은 2009년에 9월24일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당시 비밀해제된 미 공군 문서를 조사한 결과를 확인하면서 밝혀졌다. 유족회는 2002년부터 국방부와 행정안전부, 경주시에 사건의 진상을 밝혀달라는 진정을 내게 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미 공군 제18전폭단 소속 제39전투편대가 피난민이 모인 강변을 사격해 70여명이 그자리에 숨진 사건으로 매년 합동위령제가 강동면 양동리 양동초등학교에서 열린다. 비학산의 깊은 자락에서부터 시작해 수려한 풍광과 자연조건들을 만들어 온 기계천.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기계천은 다양한 이야기와 역사적 사건들을 품고서 형산강 본류로 합류한다.

▲ 인비리 고인돌군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아름다운 고인돌.
▲ 인비리 고인돌군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아름다운 고인돌.

기계 장날

박목월

아우 보래이

사람 한 평생

이러쿵 살아도

저러쿵 살아도

시큰둥하구나

누군

그저 살믄

오늘 같이 기계장도 서고,

허연 산뿌리 타고 내려와

아우님도 만나잖는가베

앙 그렁가잉

이 사람아

누군 왜 살아 사는 건가

그저 살믄

오늘 같은 날

지게 목발 받쳐 놓고

어슬어슬한 산비알 바라보며

한잔 술로

소회도 풀잖는가

그게 다 기막히는 기라

다 그게 유정한기라.

/김규형 사진작가

    김규형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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