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기획탐사
다시 형산강에서…
(11) `삼남 유수`의 명성 부조장

▲ 포항시 남구 연일읍 중명1리 마을회관 앞 형산강변으로 옮겨 세워진 부조시장 복시 선정 기념비 2기와 그 유래 및 비문 내용을 설명하는 기념 조형물. 사진=안찬규기자 ack@kbmaeil.com

구한말 격동기를 보부상들의 애환과 활약을 중심으로 그려낸 김주영의 대하소설 `객주`(客主). 이 스테디셀러에는 전국의 이름난 장시(場市)들이 등장하는데 포항 경주 일대는 부조장(扶助場)이 이름을 올려 놓고 있다.

양안에 나룻배·보부상들로 불야성 이뤄… 1780년대~1905년까지 번성
영조7년 제민창 세워 지역생산 곡물로 기근 구휼, 상품유통 요지로 성장

이른바 `삼남 유수`(三南 有數)의 명성을 얻은 부조장은 형산강 하구에 위치해 전국에서 모여든 나룻배와 보부상들로 한때 불야성을 이뤘다. 어느덧 흘러간 세월에 이제 강물에는 마천루처럼 솟은 아파트촌의 불빛들이 비춰질뿐 당시의 영화를 기록한 채 쓸쓸히 서있는 비석 몇 기를 제외하면 옛 명성은 가늠하기 조차 어렵다.

하지만 형산강의 진면목이 최근 새롭게 재조명되면서 조선 후기 형산창(兄山倉), 포항창(浦項倉)과 함께 수천리 뱃길의 함경도 백성에까지 이어진 구휼(救恤)과 전국적 물산 교역 중심지의 위상이 부활하고 있다.

□ 웃(윗)부조장과 아랫부조장

포항 도심에서 연일대교를 넘어 남구의 연일읍사무소에 이르기 직전 오른쪽 도로로 접어들면 예부터 북쪽의 흥해평야와 함께 포항의 곡창을 이루던 이른바`어미들`이 펼쳐진다. 이 들판의 서쪽 끄트머리에 자리잡고 있는 중명1동의 마을회관 앞에는 비석 2기와 이를 기념하는 조형물들이 세워져 있다. 통칭하여 부조시장 복시 선정 기념비.

이들 `현감조공동훈복시선정비`(縣監趙公東勳復市善政碑)와 `현감남공순원선정비`(縣監南公順元善政碑)는 각각 고종 15년(1878)과 24년(1887) 세워졌다. 전자는 영일현감 조동훈이 폐시된 부조시장을 복시한 데 대한 선정을 기리기 위해 동대표 손종우, 김위갑, 김도엽이 세웠다. 후자는 보부상의 접장 문주영, 장감 마성득, 부상접장 구학조 등 상인들에 힘 입었다.

형산강 하구에 터를 잡고 살던 주민과 이곳 장시를 중심으로 부를 형성한 상인들에게 조정의 폐시 조치는 실로 청천벽력이나 다름 없는 침체를 안겼다. 따라서 이를 부활케 해준 관리의 선정은 실로 칭송하고 기념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부조장은 어떤 곳이었던가?

`경주부읍지`(1789년~1791년), 경상도읍지(1832년) 등에 따르면 형산강 수계에서 가장 전국적인 상권을 형성한 부조장은 웃(윗)부조장과 아랫부조장 등 두 곳으로 개설됐다. 웃부조는 경주 강동면 국당리에 먼저 설치돼 조정의 형산창(兄山倉)이 인근에 자리한 혜택으로 인해 농·해산물 거래가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강 수심이 얕아 선박 접안이 불편해 하류에 위치한 영일현(포항) 서면의 중명동에 자리한 아랫부조장이 더 각광받게 되면서 전국 명성 부조시장의 기원이 됐다.

대략 1780년대부터 1905년까지 융성해 함경도의 명태, 강원도의 오징어, 포항 연안의 청어와 소금을 내륙으로 팔고 전라·경상도의 농산물을 교역하는 상거래 요지로 기록돼 있다. 구전(口傳)을 인용한 포항시사 기록에 따르면 당시 매매 교역을 위해 운집한 함경·전라·강원 방면의 상선들이 형산포구의 좌우 양안에 정선한 광경은 일대 장관이었다. 또 육지에는 말 한 필에 마부 한 명으로 이뤄져 100여필씩 1열 종대로 행진하는 상대(商隊)의 행렬도 볼만했다. 이북의 원산, 남해 마산, 서해 강경시장에 부조시장이 필적할 만했다는 평가를 실감케 한다. 따라서 이 일대에는 황포돛대와 객주, 여각은 물론 창고업, 위탁판매업, 숙박업이 번성했다.

하지만 1871년 봄 영일현의 치소가 연일읍 생지동에서 대잠동으로 옮긴 후 부조장은 폐시됐으며 신설된 대잠장도 시설이 미비해 이 일대 전체의 상권은 급격히 위축됐다. 7년 만에 복시가 성사된 이후 인근 지역의 경기 회복은 물론 영일현의 위상도 신장을 거듭했다. 당시의 세력을 짐작할 수 있는 일화가 있는데 19세기 중반 세도정치와 구한말 민씨 일족의 전횡 아래 매관매직이 성행하면서 영일현감 자리는 부임 1년만에 매관 대금을 충당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근대 자본주의의 맹아(萌芽)는 민족 자본으로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일본 식민주의의 착취라는 가시밭길에 운명이 닿아 있었다.

 

▲ 1929년 포항 동빈내항에 정박한 황포 돛단배들의 모습.
▲ 1929년 포항 동빈내항에 정박한 황포 돛단배들의 모습.

□ 국가 진휼창, 포항창진(浦項倉鎭)

형산강 하구의 장시인 부조시장이 전국적 물산 교역의 중심지로 부상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영조7년(1731년), 조정이 함경북도의 기민 구제를 위해 전국적인 진휼(賑恤) 제민창(濟民倉)으로 신설한 포항창진(浦項倉鎭)이 있다.

이때부터 포항에는 사상 최대의 인구가 유입돼 19세기 중엽에는 현 도심 일대를 중심으로 5개 섬마을이 형성됐다. 오늘의 포항은 영일만을 끼고 동해안과 맞닿은 포항포구, 그리고 물길을 타고 경주로 이어지는 형산포구를 겸비할 수 있었다. 조선후기 상품 유통과 전국 상권의 요지로 성장세를 이어가던 포항은 일제의 침략으로 시련을 맞았지만 식민 본국의 서안으로 연결되는 지리적 이점을 활용, 20세기에 이르러 신흥 임해도시로 발전할 수 있었다.

포항창진은 경주에서 포항 청하까지가 범위인 조세 3만석을 보관하는 100칸 크기의 전국적 국창이었다. 역사학자 배용일 포항문화원장에 따르면 지금의 대흥동인 포항동 칠성강변의 언덕에 설치된 포항창진에는 한때 공무원이 51명에 이르렀다.

포항창진의 설립 배경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백성에게 국가의 권위가 실추되고 진휼정책에 대한 요구가 증대했기 때문이다. 영조대에 들어서는 영남의 곡물은 주로 호남과 강원, 함경도로 보내졌고, 강원도는 영남과 함경·경기로, 관서(평안도)에서는 경기와 호남, 충청으로 실어날랐다. 이 가운데 함경도는 지리적으로 험준한 특성으로 인해 기근 구제에 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인접한 강원도마저 곡물이 풍족하지 않자 경상좌도(영남 동부)가 대안이 됐으며 그 중에서도 포항과 영덕이 숙종 때부터 곡물을 잠시 보관했다가 함경도로 이전되는 교차지로 기능했다.

이후 사선(私船) 임대의 조운제도가 업자들의 농간으로 중간에 고의 침몰 및 세곡 포탈 등 병폐가 심각하자 영조대왕은 관선(官船) 조운제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지리적 조건이 뛰어나고 물산이 풍부한 포항을 선택하게 됐다. 경상도관찰사 조현명(1690~1752)은 진휼당상을 지낸 관록을 바탕으로 부임 이듬해 조정에 주청, 경주부윤 김시형과 협의해 부지를 정하고 6월 3일 착공해 9월 완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포항창진도 해를 거듭할수록 곡창지대인 연일과 장기, 흥해와 청하, 경주 등 5개 고을과 거리가 멀어 운반에 어려움이 많고 동원된 백성들의 고초가 심각하자 정조7년(1783년) 즈음 혁파되기에 이르렀다. 당시 정조는 현지에 파견하는 어사에게 유시를 내렸는데 백성의 고통에 노심초사하는 개혁 군주의 면모는 어김 없이 드러난다.

“네가 곡식을 싣고 출발해 영으로 돌아온 다음에는 전수하는 상황을 그림으로 그려 올려 보내라. 내가 장차 벽에 붙여 놓고 아침저녁으로 보면서…(중략)백성들과 고락을 같이 하는 뜻을 두려는 것이다.”

배용일 포항문화원장은 “형산강의 하구에 형성된 부조시장의 뿌리는 포항창진이며 지명 탄생의 연원이기도 하다”면서 “해운과 곡창을 이점으로 한 나눔의 미덕에도 역사적 정체성의 연원을 둔 포항에서 포항항 개항 이래 44년만인 지난 2006년 북한의 화물선 구룡호가 북한 농민을 위한 비료를 싣고 출항한 일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임재현기자 imjh@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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