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br /><br />경북대 교수·인문대학
▲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대학

“그게 같은 날이야?!” 살다가 이런 말을 내뱉는 수가 있다. 우연히 날짜가 겹치는 경우에 그러하다. 한국의 현충일 6월 6일은 러시아가 사랑하는 시인 푸쉬킨의 생일날이다. 그는 1799년 6월 6일 출생했다. 우리의 개천절 10월 3일은 도이칠란트가 재통일을 이룬 날이다. 1990년 10월 3일 분단(分斷) 도이칠란트는 하나가 되었다. 그런 날이 오면 생각이 복잡해진다. “하필이면?….”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얼마 전 6월 29일을 지나면서 속내가 답답했다. 같은 날이었기 때문이다. 1987년 6월 29일과 1995년 6월 29일이 겹치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87년 평화대행진을 기억한다. 전두환-노태우-김복동으로 이어지는 육사 동기들의 권력유희를 끝장내려는 거대한 행진을 기억한다. 1987년 6월 10일-18일-26일로 이어진 시민들의 행렬(行列)과 함성(喊聲)을 기억한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이른바`6·29선언`이다.

`6·29선언`으로 만들어진`87체제`아래서 우리는 살고 있다. 정치적으로 우리는 지난 세기 87년에 만들어진 틀 안에서 생활하고 있는 셈이다. 타자기로 글 쓰고, 공중전화로 통화하고, 엽서와 편지로 마음을 공유했던 시기였다. 일상과 관계와 사건이 아주 천천히 흘러갔던 최후의 `총체성(總體性)`이 방문했던 시간대. 그래서다. `87체제`가 지나치게 낡고 우리와 무관(無關)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그런 연유(緣由)다!

`6·29선언` 이후 딱 8년 만에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502명이 사망하고 900명 넘는 사람이 부상당하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붕괴 참사였다. 때마침 검찰청에 일이 있어서 그곳을 찾아 백화점 전체를 빙 둘러 살펴보았다. 역사적인 사건을 뇌리(腦裏)에 기억하려는 노력의 소산(所産)이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 거대한 괴물(怪物)처럼 널브러져 있는 잔해더미에서 기괴함을 넘어 공포(恐怖)를 느낀 것은 나뿐이었나?!

세계화 원년이라 일컬어지는 1995년에 발생한 `삼풍참사!`그것은 창대한 예고편이었다. 대구 상인동 가스폭발사건(1995), 국제통화기금 사태(1997), 씨랜드 화재사건(1999), 대구지하철 방화 사건(2003), 그리고 2014년 `세월호 참사`와 현재 진행형인 `메르스 창궐`까지! 얼마나 많은 참사가 더 일어나야 우리는 참사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삼풍참사`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다. 그 이후에 일어난 참혹한 사건들이 그것을 입증한다. 국가는 무능했고, 권력과 집권자들은 냉담했으며, 국민들은 무심했다. 한국인들의 기억력은 38일을 넘기지 못한다는 우스개가 돌았다. 한 달만 끌면 잊힌다는 것이 정설이다. 1862년 출간된 `레미제라블`에서 빅토르 위고는 프랑스인들의 기억력이 불과 6개월밖에 지속되지 않음을 한탄했다!

국민이 언제든 죽음으로 내몰릴 수 있는 위험천만(危險千萬)한 상황을 방치(放置)하는 권력과 권부(權府)의 행태는 반복되고 있다. 전면적인 성찰이나 대비책은 만들어진 적도 없고, 온전하게 작동된 적도 없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토록 인명(人命)을 경시하는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낡아빠진 `87체제`의 모순(矛盾)을 극복하고 21세기 조변석개(朝變夕改)하는 세계정세를 응시해야 하는 시점에 정파내부의 권력투쟁이라니. 그리스의 국가부도사태가 현실화되고, 중국의 `일대일로`정책이 빛을 발하고,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논쟁`이 뜨거운 시점이다. 그런데 내 조국은 어떠한가?! 정치권력을 능가(駕)하는 재벌경제의 중추 삼성의 `메르스 사태`와 제일제당 CJ의 국가농락이 기승을 부린다.

우리가 참사의 기억(記憶)으로부터 자유(自由)롭고자 한다면, 우리를 강제(强制)하는 `87체제`를 극복(克服)하는 방도(方途) 외에는 없어 보인다. 국민의 알권리와 천부인권과 인간답게 살 권리를 우리 스스로 얻어가는 도리밖에는 다른 수가 없을 듯하다. 모진 가뭄으로 대지가 신음하고 `4대강 사업`으로 강물이 병들어가는 한여름 악몽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