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순일 수필가

엄마는 요양병원에 모셔진 후 병이 깊어졌다. 가끔 나를 보고는 `애기엄마`라고 부르며 해맑게 웃곤 하신다. 그런 엄마를 두고 어디를 간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살아계실 때 많이 보고 잘해 주자고 다짐했는데 여행갈 일이 생겼다. 갈등하는 내게 지인들은 사람 목숨 그리 쉬이 끝나는 거 아니라며 마음을 흔들어댄다. 내가 하는 일과 연관되어 좋은 기회라는 건 알지만, 나 없는 사이 엄마가 어떻게 되지 않을까 싶어 결국 포기하기로 했다.

그런데 출발 일주일 전 쯤 단체 회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한 사람이 갑자기 못 가게 되었다며 꼭 같이 갔으면 한다. 희한하게도 그 무렵 엄마는 눈빛도 맑아지고, 목소리도 분명해지셔서 이승에 머물 시간이 조금은 더 남은 듯 했다. 병원에서나 오빠도 괜찮을 거라며 다녀오기를 권했다.

“엄마, 일주일 동안 숨 열심히 쉬고 있어. 중국 갔다 올게.”

“응! 잘 갔다 와!” 하며 웃으신다.

북경에 도착하니 해는 기울었다. 엄마는 잘 견디고 계시는지 걱정이다. 요양병원에서 엄마는 `스마일할머니`로 불린다. 누구에게나 수줍은 미소로 대하며 겸손하시다. 옛 기억도 청춘도 풍선에 바람 빠져나가듯 사라졌는데 그 미소만큼은 한결같다. 맨 잇몸을 드러내며 함박웃음을 웃으실 땐 영락없는 어린아이다. 화사한 웃음은 좋은 일만 있기를 바라는 엄마의 간절한 기도 같다. 아프고 고단했던 많은 날들을 순박한 웃음으로 덮어놓고 해탈하신 듯 평온해 하는 모습을 보자 마음이 아리다.

지는 해를 보며 멍하니 서 있으니 일행 중 한 명이 손을 잡아끈다. 눈앞에 북경시 최대 규모의 농산물전문도매시장인 `신발지농산물유통재래시장`이 보인다. 도로는 자동차와 자전거, 사람까지 뒤섞여 부산스러웠고 거리는 지저분했다. 하지만 규모는 무척 커서 품목마다 우리네 시장 하나정도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 곳곳마다 잘생긴 농산물들이 내일 새벽 출하를 위하여 하역되어지고 있었는데, 꾀죄죄한 중국 노동자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우리 일행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북경은 최고들이 모이는 곳이다. 사람도 아무나 들어와 살 수 없고 농수산물 또한 최고여야만 반입이 가능한 곳이다. 중국은 마약이나 식품에 대한 법이 몹시 엄격하여 최고 사형까지 집행하지만, 그래도 돈에 눈이 먼 자들이 종종 있다고 한다. 먹지도 못할 것들을 우리에게 팔아치우는, 중국인들의 파렴치함을 토로하자 가이드가 일침을 놓는다. 수입하는 자가 싼 가격의 저질 농산물을 원하기 때문이니 혈압을 올리지 말라한다. 중국에선 도리어 우리나라의 그런 소수들을 욕한다고 한다. 그런가? 일리가 있다.

북경의 밤은 조용하고 근엄했다. 건물들은 웅장했고 백화점은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과 고급 상품들로 아름답게 진열되어 있다. 100m나 되는 거리의 포장마차가 깨끗하고 다양한 종류의 음식들로 손님을 맞이하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여섯시를 넘기자 휴대전화 벨이 울린다. 큰조카가 엄마의 임종소식을 알린다. 뒤이어, 엄마 잘 모실 테니 일행에게 소란 떨지 말고 일정 끝내고 오라는 오빠의 당부가 따른다. 몇 달 동안 애달파 하고 수없이 흘렸던 눈물 탓인지 의외로 담담하다. 그 후 입안이 연신 마르고 다리의 무게는 천근처럼 느껴져 힘들었지만, 엄마가 마음먹고 보내준 여행이라 생각하며 마음을 달랬다.

기대하던 문화체험을 하며 오고 감에 대한 생각은 깊었다. 한 시대를 풍미하던 위인들도 어디론가 떠나 자취만 남아있고, 일생 노심초사 자식걱정에 몇 날 편하기나 하셨을까 싶은 엄마도 사랑만 남기고 돌아가셨다. 가시는 길 이 부디 평안하시길 기원하며, 더 주지 못하여 늘 안타깝던 엄마의 극진했던 사랑을 되새겨 볼 뿐이다. 사노라면 뜻하지 않은 일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돌아오니 딸과 아들이 그간의 일들을 휴대전화 영상으로 보여준다. 아흔을 넘기고 떠나신 엄마의 장례식은 심각함이나 비통함 없이 예를 갖춘 의식이었다. 엄마의 맑은 미소를 떠올리며 그 평온함을 닮아 가야지 애써 마음을 다독여보지만 삼킴 장애로 음식 넘기기가 힘들어 나는 며칠을 앓아누웠다.

    백순일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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