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다안수필가
침대에 몸을 눕힌다. 아들 녀석이 귀가하는 시간까지 완전한 자유다. 종일 침대에 누워있어도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은 없다. 조용하고 편안하다. 꼭 섬에 온 듯하다. 침대 위가 섬이라고 상상해 본다.

어느 한적한 남해의 작고 예쁜 섬. 한가로이 바다를 바라보며 피곤한 일상을 위로받는 심정으로 눈을 감는다. 정말로 바다가 보이는 것 같다. 배를 타고 저 멀리 보이는 나의 섬에 도착한다. 내 섬 주위에는 손만 뻗치면 전화기, 핸드폰, 노트북, 리모컨과 몇 권의 시집과 소설집이 이리저리 뒹굴고 있다. 생리적인 현상을 해결하는 일 말고는 섬에서 나오지 않아도 된다.

정렬되지 않은 널브러진 물건들이 긴장감을 풀어준다. 책 읽다가 잠 오면 자고, 지루하다 싶으면 TV보고, 그것마저도 재미없다 싶으면 인터넷사이트를 유영하기도 한다.

두어 평 남짓한 `침대섬`. 섬에 있는 동안 내가 디딘 거실과 주방, 집안 곳곳은 뭍이 된다. 뭍은 오늘 나와 떨어져 있다. 하기에 뭍에서의 나는 없고 오직`침대섬`에서의 나만 존재할 뿐이다. 한마디로 이곳은 게으름 그 자체를 누릴 수 있는 곳이다. 이런 시간을 즐기기 위해 나는 열흘에 이틀 정도는 아무런 약속을 하지 않고 섬 생활을 즐긴다. 부족한 잠과 결핍된 생각들을 채워주는 보약 같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종일 그렇게 지낼 수 있을까 싶지만, 이 생활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다. 시간 개념 없이 `침대섬`에서 즐기는 거드름은 에너지로 다시 생성된다.

바쁘게 코앞의 일만 처리하며 살다 보니 놓치는 일들이 많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과 잠시 잊고 살았던 사람들도 생각나고 무엇보다 여유가 생겨나 좋다. 사색과 공상에 잠기다 보면 뜻하지 않았던 생각을 퍼 올릴 수 있다.

때로는 좋은 생각과 나쁜 생각들이 뒤섞여 본성을 건드리기도 한다. 내 위주로 판단한 모든 것들을 개조해 보고 싶기도 했다가, 이내 나를 알아주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또 살아가는 맛을 찾는다. 인생이 이분법인 줄 알았는데 아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 어떤 생각을 가지고 방향을 돌려가며 생각하다 보면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없다. 다만 차이일 뿐이다.

어느새 섬에도 어둠이 내려앉는다. 낮과 밤이 만나는 시간은 왠지 허전하고 쓸쓸해진다. 낮도 아닌 밤도 아닌 경계의 시간은 어쩌면 시간 속에 없는 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일까? 이 시간은 민감하고 예민해진다. 나도 그 시간 속에는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 탓일까? 길 잃은 아이 마냥, 갑자기 낮잠에서 깨어났을 때 주위가 낯설게 느껴지는 것처럼 잠시 방향감각을 잃는다.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눈에 익은 살림살이가 낯설게만 느껴진다.

예전에 나는 행주와 걸레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유난히 깔끔을 떨며 살았다. 눈 뜨면 닦고 눈 감기 전에도 닦는 일을 충실히 했다. 전업주부인 나는 주부로서의 본분을 다한 셈이다. 그 성실함에 부지런함까지 있었으니 그야말로 성실한 부지런함을 가졌다. 그런데 어느 순간 성실하면서 부지런하기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어 부지런함을 부정하고 싶었다. 성실하기만 하면 되는데 부지런하기까지 한 삶이 재미없어졌다. 주부라는 본분은 성실히 하되 조금은 게을러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내가 요즘 생각하는 성실한 게으름이다. 가정주부로서 밥상은 책임지면서 매 끼니때마다 설거지 하는 것이 아니고 가끔은 오늘처럼 게으름을 피우면서 한꺼번에 하는 요령을 알았다. 이제는 행주와 걸레를 싱크대 위와 바닥에 있는 것으로 구별하면 되는 게으름의 도를 터득한 것이다. 이렇게 살아보니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여유도 생겼고 고단한 몸도 훨씬 편해졌다.

나는 성실한 게으름으로 일상의 피로를 가끔 침대섬에서 보낸다. 나만의 스트레스 해소법으로 그만이다. 눕고 싶으면 눕고, 앉고 싶으면 또 그렇게 하고 누구의 간섭,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어떤 격식과 형식이 필요 없는 이곳이 좋다.

좁아도 한없이 넉넉하고 외로워도 행복한 섬, 그 어떤 섬도 내겐 나의 침대섬만큼 편안한 곳은 없다. 그런 성실한 게으름이 나는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