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영화 ㈜진심식품 대표이사·시인

중국 역사를 통틀어 시선으로 추앙되고 있는 성당시대의 이백이 고구려의 춤을 감상한 시가해동역사(海東譯史)에 수록돼 있다. `절풍모에 금꽃을 꽂고/백마 타고 느릿느릿 돌아들며/넓은 소매 자락 너울대는 춤/해동에서 금방 날아 든 새 같아`

`절풍모`는 양옆에 깃털을 꽂고, 황금 장식을 한 고구려인들의 모자이고 `넓은 소매 자락 너울대는 춤`은 고구려의 춤, 광수무(廣袖舞)인데 구당서(舊唐書)에는 이 춤의 해설도 실려 있어 매우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수당 시절의 중국인들이 고구려의 춤과 깊은 관계를 맺는 게 과연 가능했을까?

수서(隨書)의 음악지(音樂志)에는 칠부기(七部技)와 구부기(九部技)라는 용어가 나오고 당에 이르러서도 십부기(十部技)라는 용어도 보인다. 이는 수와 당의 궁중 연회용 춤과 음악을 유형별로 나눈 예기(藝技)들의 이름이다. 놀라운 것은 고구려의 음악과 무용을 고려기(高麗技)라 하여 저들의 연회에 하나의 부로 편입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고구려 역시 1세기 초부터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하였고 실크로드를 통해 수입된 서역의 문물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시기였다. 서역계의 무악(舞樂)과 함께 비파와 공후 그리고 호악(胡樂)과 호무(胡舞)가 전해지고 고구려 무덤인 동수묘(冬壽墓)의 후실벽화와 장천 1호분 북쪽 벽의 `백희기악도(百戱伎樂圖)`에 그려놓은 서역인과 서역 집시계 유랑집단의 기예 장면을 보면 의문의 여지가 없어진다.

수와 당의 궁정 연회용 춤과 음악에 고구려기가 편성돼 있었다는 사실과 서역의 가무백희가 그대로 고구려에서 연희되고 고구려의 그것이 중국의 궁정 연회에서 연희되는 시대! 그리하여 서로가 소통하고 벽화로 시가와 춤으로 서로 공유하고 향유하는 문화였다는 이런 정황들은 사실, 고구려의 예기가 중국의 그것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반면에 향가를 만든 신라인들은 초기에는 4구체, 8구체 형식으로 중국의 노래 형식을 따르다가 전혀 새로운 형식인 10구체를 창안해낸다. 한자를 빌려 쓰면서도 노랫말의 섬세함을 포기할 수 없어서 향찰문자를 만들어 불렀던 신라인들은 중국의 옷이 못내 불편했을 것이다. 그리고 `처용가`가 처용무로 추어졌던 만큼 거개의 향가는 당연히 춤과 함께 한 것이었으니 새로운 형식에 맞는 장단과 그 장단에 맞는 춤이 당연히 생기지 않았겠는가?

나는 지금 돋을새김으로 우아하게 모두 앉은 상원사 동종의 비천상을 만나고 있다. 에밀레종으로 널리 알려진 봉덕사종의 비천상이 성숙한 여인이라면 상원사 동종의 비천상은 청순한 소녀의 이미지다. 소녀가 부르는 노래와 연주는 이전에는 전혀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음악이다. 드디어 춤이 시작된다. 옷자락이 하늘하늘 나부낀다. 춤사위는 장단을 따르는가 싶더니 그의 춤길은 박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장단의 마디를 무시한다. 그 때마다 부드럽게 원을 그리며 내려앉던 옷자락들이 일순 거꾸로 돌아든다. 섬세한 발사위로 마치 뱃길을 노니는 듯 출렁이다가는 또박또박 박과 박만을 짚어간다. 급기야는 한껏 신명이 오른 현란한 가락을 허리춤에 동여매고 그저 어깨사위로 어르는가 싶더니 무심히 걷기만 한다.

새로움의 요체는 엇박이다. 나는 진짜 우리 것이 탄생하는 장면을 본 것이다. 신라인들의 울음소리가 온몸을 타고 밀려온다. 눈물이 솟구친다. 눈물과 함께 속 깊은 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온다. 신라의 예술혼, 엇의 미학을 형상화 시킨 비천상의 속삭임이 가슴에서 들린다. “새기고 배워라! 나는 최초의 차이(差異)이자 한류의 시작이며 진정한 창조의 기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