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규종 경북대 교수·인문대학

`노자삼보`라는 말은 낯설지 모르겠다. `도덕경`을 읽은 사람들은 `상선약수(上善若水)`나 `무위자연 (無爲自然)` 혹은 `유약승강강 (柔弱勝剛强)` 같은 말에 익숙할 것이다. 그러하되 노자는 인생과 세상을 거론함으로써 퍼내고 다시 퍼내도 마르지 않는 커다란 샘을 제공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노자삼보`라고 생각한다.

“아유삼보(我有三寶), 지이보지(持而保之) 일왈 자(一曰 慈) 이왈 검(二曰 儉), 삼왈 불감위천하선(三曰 不敢爲天下先)” (도덕경·제67장)

“내게는 세 가지 보물이 있어서 그것을 간직하여 소중히 지키고 있다. 그 하나가 자애로움이고, 그 둘이 검약이며, 그 셋이 천하를 위해 감히 나서지 않는 것이다”

노자가 살았던 춘추시대는 천자의 나라 주나라가 쇠미해 전란이 끊이지 않았던 시기였다. 노자는 대륙전역을 휘감고 돌던 전운과 살육(殺戮)을 피해 푸른 소를 타고 함곡관(函谷關)을 지나 홀연히 사라져버린다. 하지만 거기서 윤희를 만나게 되어 하룻밤에 써주었다는 글이 `도덕경`이다. 저잣거리의 시끌벅적함과 세상의 명리(名利)와 홍진(紅塵)을 버리고 은거하기 직전의 소회(所懷)가 차고 넘치는 `도덕경`.

그가 설했던 삼보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리라 믿는다. 사람이 어디에 있든 모든 죽을 운명에 처한 것들에 대한 자애로움은 근본 가운데 근본이다. 검약은 모두 가난했던 옛날이나, 빈부격차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이 만연한 요즘에도 소중한 덕목이다. 그럼에도 내가 중시하는 덕목은 세 번째 항목인`불감위천하선`이다. 왜 그럴까?!

노자 스스로 그 해답을 주고 있다. 감히 나서지 않기 때문에 능히 그릇을 이루고 자라게 된다는 것이다. 그릇을 이루고 자란다는 것(能成器長)을 세상의 우두머리가 된다거나 그릇들 가운데 으뜸가는 그릇이 된다고 옮기는 사람도 있다. 여하튼 나서지 않음으로써 무엇인가를 이룬다는 의미로 해석 가능하다.

그런데 여러분 주위를 돌아보시라! 우리 주변에는 감히 나서는 사람들이 적잖다. 자신의 존재의미와 존재가치를 실현하는 방도(方途) 가운데 하나로 현대인은 앞 다퉈 스스로 나서고 있는 게다. 나서는 영역도 다채롭기 그지없다. 식당이나 주점에서 주위를 돌아보면 귀담아 듣는 사람보다 핏대 올리며 떠드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그런 곳에서조차 감히 나서지 않는 사람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사정이 이러다보니 나라 안이 언제나 시끄럽고 바람 잘 날 없다. 다들 잘났다고 떠들어대니 고요할 겨를이 없는 것이다. 하나의 사안(事案)에 대한 전면적인 성찰이나 사유, 그리고 그것에 기초한 충분한 토론이 있고 난 연후에 판단하고 말해도 충분하다. 어쩌면 그것은 반드시 준수해야 할 절차이자 도리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의 상황은 그렇지 않다. 그것이 결과한 것은 목소리 크고, 고집 세며, 연줄 있고, 빽 있는 자들이 득세하는 소인배 천국이다. 끼리끼리 해먹는 연고주의(緣故主義)와 지역패권과 파당(派黨)의 이해관계 관철이 일상화돼 있다. 정작 천하를 위해 나서야 할 사람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손사래만 치고 있는 형국 아닌가!

나는 이런 불합리(不合理)하고 부조리(不條理)하며 부도덕(不道德)하고 불의(不義)한 상황의 조속한 종결을 고대한다. 그것이야말로 이 땅의 오랜 숙원(宿怨)인 민초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노자가 `불감위천하선`을 주장한 것은 혼탁(混濁)한 시대상이 첫째가는 원인이다. 하지만 21세기 대명천지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들은 더 이상 팔짱끼고 수수방관(袖手傍觀)하면 안 될 듯하다. 무관심과 냉담함이 야기하는 사회 정치적인 폐해가 우심하기 때문이다. 노자삼보의 핵심은 개인수양과 은일(隱逸)에 있다. 그것의 생활화가 가능하다면 그리 하되, 녹록치 않은 나라안팎의 정세로 보건대 자애롭고 검약한 사람들의 `감위천하선`은 이제 시대의 소명(召命)이 되고 말았다는 소감이다.

창밖에 겨울비가 대지를 촉촉이 적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