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인 번호 264

▲ 김근혜 대구 행복의 전화 소장

한적한 겨울 거리는 바람 소리만 요란하다. 미처 떠나지 못한 낙엽들이 거리를 헤맨다. 저들의 거처는 어디인가. 이 광활한 우주에 떠돌이로 돌다가 생을 마치는 건 아닌지 이름 모를 노숙자들의 삶 같아 쓸쓸하다.

안동은 정신문화의 고장이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하회마을을 비롯해 도산서원, 퇴계 종택, 농암 고택, 군자마을 등, 양반 고을의 전통과 문화가 살아 숨 쉰다. 차로 이동하는 중에 독립운동을 한 애국자들의 비석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그러고 보니 안동은 한국 근대 최초의 갑오의병이 일어난 한국 독립운동의 발상지가 아닌가.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독립운동 유공자, 자정 순국자가 나온 곳이기도 하다. 내 조상의 고향이기도 해서 더 각별하게 느껴진다. 안동 땅을 밟으니 어린 시절 생각이 난다. 아버지도 양반가 집안에서 나고 자라신 분이다. 한학 공부를 많이 하신 분이다 보니 예(禮)를 중히 여겼다.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마실 이다. 이 마실은 “하늘이 아끼고 땅이 감추어 둔 그윽하고 구석진 두메산골로 고려 공민왕의 전설이 흐르는 곳”이다. 마실 뒤로 뻗어 내려온 다섯 산줄기와 낙동강의 조화는 다섯 손가락으로 비파를 타는 형국이라고 한다. 이 마실은 항일 독립운동을 한 지사가 많으며 그 중의 한 사람인 저항 시인을 만나 본다.

이육사이다. 선생은 퇴계 이황의 후손으로서 원천리에서 태어났다. 원천리는 먼 냇가 마실이란 뜻이다. 국어책에서 대하던 이 육사가 나고 자란 곳을 꼭 한번 봐야겠다는 생각은 했으나 기억 속에서 잠들고 있었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강철로 된 무지개를 따라 마침내` 안동에 왔다.

원천리 마실에 세워진 이육사 문학관은 겨울이라 그런지 썰렁하다. 앞에는 확 트인 들판과 낙동강이 흐른다. 전시실엔 시인이자 독립투사인 이육사의 문학세계와 독립 운동사를 볼 수 있다. 이 마실은 넓은 강변에 쌓인 모래가 정결하고 광채가 아름답다 하여 예로부터 천사미라 불렸다. 안동댐 건설 전에는 마실 앞 모래강변에 서식하는 은어가 별미여서 예로부터 임금님께 진상했다.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이면 이 곳에서 백일장과 시낭송 대회가 열리기도 한다.

▲ 이육사 문학관
▲ 이육사 문학관
선생의 대표작 `절정`이 새겨진 시비를 보며 왕모산을 올랐다.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안동으로 왔을 때 왕의 어머니인 명덕태후가 이곳에 피난하였다고 하여 왕모산이라 한다. 홍건적이 이곳까지 진격하여 공민왕이 위태롭게 되자 백마 탄 늙은 장수가 왕을 구하고 지렁이로 변했다는 전설이 흐른다. 왕모산 능선을 비켜서 있는 갈선대는 웬만큼 담이 크지 않고서야 벼랑 쪽으로 다가갈 수조차 없다. “한 발 재겨 디딜” 곳 없이 아찔하다. 절벽은 칼을 세워둔 듯 날카롭기까지 하다. 이곳은 선생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절정`의 시상지로 유명하다.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서다.`,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두 싯구는 절벽에 서 본 자만이 선생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 거다. 당시의 우리나라 시대적 상황은 벼랑 끝에 선 것과 다름없이 위태로웠을 것이다. 선생은 희망을 보며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개”라 했다. `강철`은 끝까지 굴복하지 않을 것임을 보이는 선생의 의지가 아닐까.

어디서 보았던가. 갈선대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섬 속 마실, 회룡포를 닮았다. 이 마실은 도산구곡 중 여섯 번째인 천사곡과 일곱 번째인 단사곡 물길이 태극 모양을 하며 마실을 휘돌아 삼남으로 흘러간다. 절벽이 신기하여 하산하면서 산 아래에서도 올려다보며 시를 음미해 본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육사는 이곳에 올라 나라 잃은 슬픔과 울분을 시로 표현했다. `절정`은 시들어가는 민족혼을 눈뜨게 해준 횃불과도 같은 시다.

선생의 본명은 이 원록이지만 우리에게는 낯설다. 늘 `이육사`란 이름으로 우리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은 일제의 탄압으로 여러 차례 감옥에 갇히게 되는데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되어 형, 아우와 함께 대구지방법원에 송치되었고 미결수 번호가 264번이었다. 그때부터 수감 번호를 자신의 필명으로 삼았다. 사십 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살면서 무려 열일곱 번이나 투옥되거나 구금되었다. 네 아들의 피 묻은 빨래를 해야 하는 선생 어머니의 고통 또한 얼마나 컸으랴. 선생은 짧은 생애 동안 서른아홉 편의 시를 썼는데 여섯, 일곱 편 가량이 명시로 알려졌다. 작품 속에는 독립에 대한 강철 같은 의지와 나라 잃은 슬픔이 담겨져 있다.

작품성도 우월하지만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곳곳에 베여 있어 부끄러움에 고개가 수그려진다. 일제 강점기, 암흑시대를 밝혔던 민족 시인이자 저항 시인인 이육사를 가슴에 묻고 간다.“툰드라의 새벽이 차다. 의지가지없는 그들의 심장이 얼마나 떨리고 있는가. 매운 술을 마셔 돌아가는 발자취 소리.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겨울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황혼녘에 내리는 외로움이 가슴을 엄습한다. 이를 어이할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