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부환 유럽경제문화연구소장

여러 의미를 지닌 `이케아(IKEA)세대`라는 신조어들이 탄생하고 있다. `이케아세대`는 외국문화에 높은 안목을 가지고 있지만 넉넉치 않은 주머니 사정으로 주로 저렴하고 단순한 가구를 사용하며 2~3년마다 거처를 옮겨 다니는 30대를 지칭하고 있다. `이케아세대`를 좀 더 현실적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빼어난 스펙을 가졌지만 불안전한 고용으로 결혼 등 미래를 계획하기 어려운 20·30대 젊은이들을 일컫는다. 각종 자격증과 어학연수 등 화려한 스펙을 가졌지만 낮은 임금의 계약직에 고용되는 경우도 잦아 암울한 우리 젊은이들의 경제적 현실을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 젊은이들의 결혼포기는 결국 출산의 포기로 이어지므로 정치권은 물론 사회 모두가 함께 고민하면서 풀어가야 할 과제다.

이케아는 연매출액 40조원을 돌파하는 스웨덴의 세계적인 가구업체이자 그 브랜드다. 이케아세대 신조어에서 봤듯이 이케아가구는 실용성과 경제적 가치가 뛰어나지만 가격은 그토록 저렴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오는 18일부터 아시아 최대 규모의 이케아 매장이 드디어 경기도 광명에 오픈되면서 한국 가구업계를 긴장시키고 있다.

이케아를 설립한 사람은 잉그바르 캄프라드(Ingvar Kamprad·88)다. 캄프라드는 1926년 엘름타리드(Elmtaryd)농장에서 태어났는데 그곳은 당시 스웨덴에서 가장 가난한 아군나리드(Agunnarid)지역에 속해 있었다. IKEA라는 회사 이름은 그의 이름과 출생지의 첫 글자를 모은 것이다. 그는 17살 되던 해 가난한 아버지의 용돈을 빌려 볼펜 등을 팔아 모은 돈을 종자돈으로 가구회사를 설립했다.

캄프라드의 첫 작품은 울창한 스웨덴의 고향 숲 속에서 탄생했다. 그는 모든 시민을 위한 값싼 물건을 만들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홀로 숲 속에서 땀방울을 흘리며 좋은 나무를 골라 다듬고 부수고 맞춰나갔다. 외로운 작업에 골몰하면서 선을 보인 첫 작품은 나무로 만든 사다리꼴 모양의 우유통 운반도구였다. 그때가 1951년, 오늘날 세계적인 가구업체 이케아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그는 이때부터 다른 것은 포기하고 오직 값싸고 품질 좋은 가구 생산에만 매달리게 된다.

1950년대 스웨덴 사회민주당이 민족 스웨덴을 외쳤을 때 캄프라드는 `가구 스웨덴`을 위해 자신의 운명을 걸었다. “땀은 정직하고 좋은 것이다”라면서 근면과 절약을 강조했던 캄프라드는 실제로 자전거로 출퇴근했다. 노동자의 귀중한 땀과 자신의 땀을 사랑한 캄프라드는 직원들에게 이면지 사용을 지시해 자신들에 의해 파괴되는 숲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기도 했다.

이케아는 대형 백화점이 장악하고 있던 유럽의 가구 유통 구조를 단숨에 파괴해 버렸다. 기존의 유통 구조와 완제품 가구형태로는 운반 과정도 복잡했고 가격도 비싸게 책정될 수밖에 없었다. 누구보다 귀중한 땀방울을 흘리며 일하는 노동자에게는 그림의 떡인 가구들이었고 그는 그런 점을 슬퍼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안된 저렴한 조립식 가구는 유럽의 가구업계에 일대 혁명을 불러일으켰다. 가격의 절반은 조립하는 당신의 땀에 포함돼 있다는 슬로건으로 가격을 대폭 낮췄다. 구매자가 직접 조립하는 이른바 DIY(Do it yourself)다. 하지만 땀 흘리는 수고보다는 조립하는 재미가 더 컸다. 새로움을 창조하듯 하나둘씩 맞추어가면서 드러나는 가구의 형상은 어른들의 성취감을 충족시키는 훌륭한 장난감이었다. 이케아는 그렇게 성장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케아가 국내서 성공을 거둘지는 미지수다. 국내개점을 앞두고 논란이 그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해외서 판매하는 이케아 제작품 벽걸이용 세계지도에서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하는가 하면 이케아 가구가격이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한국에서 비싸게 책정되고 있다는 여론 등이다. 한국시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1998년에 들어왔다가 2006년에 철수한 `월마트`, 1996년에 진출했다가 같은 해 퇴각한 `까르푸` 등의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국내 가구업계가 어떻게 진일보 분발할 지, 이케아와 함께 어떻게 소비자를 위해 상생할 것인지도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