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대환 작가·계간 문학지 `ASIA` 발행인

`진정한 소설`에 대하여 골똘히 생각해본 적 없는 인간들이 우리나라에는 많다. `진정한 소설`이 사회체제나 권력동네의 깊숙한 어딘가에 암세포 덩어리처럼 발육하는 `악의 실체`를 어떻게 밝혀내는가에 대해 까맣게 모르는 인간들이 우리나라에는 많다. `진정한 소설`이 평범한 시민의 술자리나 수다자리에 올라온 굉장한 화젯거리의 배후에 숨겨진 `진실`을 어떻게 피사체처럼 찍어내는가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인간들이 권력동네에는 부지기수로 많다. 물론 그러한 인간들은 세계 여러 나라에도 많은데, 그들 모두의 공통점은 `진정한 소설`에 대하여 전혀 몰라도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고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아니, 그래서 더 편하게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그들 모두는 또 다른 공통점을 갖고 있다. 자신이 모종의 흉계나 음모에 걸려 고통을 당하는 경우에든 자신의 엄청난 비밀이 들통 나서 고통을 피할 수 없게 된 경우에든 정말 웃기게도 한결같이 `소설`이라는 단어를 믿음직한 방패처럼 흔들며 `소설`이라는 단어를 욕설처럼 뱉어댄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그들 모두가 방어본능처럼 저지르는 짓이기도 하다. 숱한 사례들을 일일이 다 들춰내기란 불가능한 일이니, 지금 우리 눈앞에 전개되는 사례 하나만 보자.

첫 추위가 밀물처럼 밀려온 이즈음에 `소설`이란 단어가 또다시 모욕적 수난을 당하고 있다. 이번 주인공은 `정윤회`와 `십상시`다. 며칠 전에 정윤회는 청와대 문고리 권력이라 불리는 3명과 만난 적이 없으니 “하나라도 사실이면 감방 가겠다”며 “소설”이란 단어를 들이댔다. 청와대에서 유출된 문제의 문건을 근거한 보도가 `거짓`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니까 정윤회는 “모든 게 다 말짱 거짓이다”라고 말해야 할 자리에서 “소설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진정한 소설`에 대한 명예훼손이 성립될 수 있다.

이번 정윤회의 `소설` 발언과 유사한 사례는 말했다시피 여러 나라들에 수두룩하다. “그건 거짓이다”라고 말해야 할 경우에 마치 방어본능이 작동되듯 “그건 소설이다”라고 뱉는 것이 무슨 상식이란 말인가? 더러운 감정을 못 참는 경우의 욕설과 같은 것이란 말인가?

시시껄렁한 우스갯소리나 신변잡기나 성감대를 자극하느라 바쁘거나, 대충 뭐 그렇고 그런 `소설`만으로 한정할 경우에는, 이번에 정윤회가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소설`이라고 우겨대도 괜찮다. 그따위 소설이란 재미나 오락을 위해, 즉 서비스를 위해 온갖 구질구질한 거짓을 잔뜩 생산해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소설`은 다르다. 그렇게 `소설`이란 단어가 함부로 뱉어지는 것을 참기 어렵다. 분노할 수도 있다. 인간 존재의 근원을 성찰하며 진선미를 추구하고, 당대를 활보하는 야만에 맞서며 시대정신을 창출하고, 모든 권력의 폭력성을 감시하며 더 인간적인 사회체제를 탐구하는 문학, 이것이 `진정한 소설`이다.

`진정한 소설`이 활용하는 거짓, 그 허구란 무엇인가? 이것은 어떤 현상들의 배후에 똬리를 틀어 도사리고 있는 `총체적 사실`이나 `실체적 진실`을 포착하고 체포하고 적출(摘出)하려는`진정한 작가`에게 문학(예술)이 부여한 거의 유일한 특권이다. `진정한 작가`는 그 거짓, 그 허구의 특권, 그 유일한 권력적 수단(도구)을 활용해서 `진정한 소설`에 활기찬 상상력을 불어넣고 첨예한 작가정신을 살려내며 드디어는 작가정신이 노리는 그 현상들의 배후에 도사린 `총체적 사실` 또는 `실체적 진실`을 포착하거나 체포하거나 적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나 함부로 `소설`이란 단어를 뱉어대다니? 정말 `진정한 소설`이 무엇인가를 까맣게 몰라서 그러는 것인가? 우리나라 신간시장에서 `진정한 소설`이 어디론가 자취를 감춘 지가 오래 된다는 수치스런 비밀을 안다는 말인가? 아니면 `소설`이란 단어가 진실을 숨겨줄 듬직한 `방패`라도 된다는 것인가?

이제부터는 누구든 자기방어를 위해 `소설`이란 단어를 뱉지 말라. 아직 우리나라에는 `진정한 소설`을 창작하려고 좀체 인생의 긴장을 풀지 못하는 `진정한 작가`들이 아무렇게나 `소설`을 방패나 욕설처럼 써먹는 자들을 응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