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실을 가다
영주시 순흥면 마실

▲ 금성대군 신단
▲ 금성대군 신단
삶의 무게를 다 털어내고 서 있는 나목. 초겨울 속으로 짧은 햇살이 스며든다. 마지막 이파리 마저도 갈 길을 가고, 무성했던 지난날의 영화만 남아 오가는 이의 가슴을 적시는구나.

`영주 순흥` 하면 무엇이 먼저 떠오를까. 조선 시대 삼백오십 삼 년 동안 사천여 명의 선비를 배출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일까. 선비들이 실제로 살았던 생활공간을 복원한 선비촌에서 묵객이 되어보는 즐거움일까. 퇴계 이황을 비롯해 수많은 선비가 걸었던 소백산 자락을 따라 걸으며 초겨울의 정취를 느껴보는 낭만일까. 영주 순흥면 마실에선 어떤 꿈도 이루어진다.

금성대군의 충절이 서려 있는 금성단이 발목을 잡는다. 신단은 사적 제491호로 세종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과 순흥 부사 이보흠 및 고향의 유림과 더불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순절한 의사들의 충절을 기리는 곳이다. 금성대군은 성품이 강직하고 충성심이 많아 맏형인 문종의 뜻을 받들어 어린 단종을 끝까지 보호하려다가 비참한 최후를 마치고 말았다. 홍천 현감 이대근이 선영을 다녀오던 중 순흥 청다리를 지날 때 그가 탄 말이 길을 피하여 비껴가는 곳이 있으므로 이를 이상하게 여겼다. 그날 밤 꿈에 금성대군이 나타나 그곳은 자신이 피 흘린 곳임을 말함으로써 곧 부사와 함께 사람을 시켜 조사한 후 혈흔이 묻은 돌을 발견하고 주변에 단을 쌓고 제사를 지냈다.

신단 뒤에는 금성대군의 죽음을 지켜본 경상북도 보호수, 제46호인 천 이백 년 된 은행나무가 있다. 은행나무의 잎이 오리발처럼 생겼다고 해서 압각수라고 부른다. 이 나무는 충신수라고도 하며 순흥의 흥망성쇠를 함께 한 경이로운 이력이 있어 유명하다. 언제부터인지 “순흥이 죽으면 이 나무도 죽고, 이 나무가 살아나면 순흥도 살아나네.”라는 참요가 불렸다.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운동이 실패하고 순흥 도호부가 초토화되면서 이 나무도 불에 타 죽어버렸다. 세월이 흘러 밑둥치만 남아 있는 나무에 새로운 가지와 잎이 돋아나더니 노래처럼 순흥부도 다시 설치되었다고 한다. 금성대군과 연관된 수양대군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원래 수양대군의 이름은 진양대군이었으나 세종이 대군의 성품을 알고?수양산에서 절개를 지키다 굶어 죽은 백이와 숙제처럼 절개를 지키라는 의미를 가진 수양대군으로 이름을 고쳤다. 수양대군은 아버지보다 할아버지인 태종 이방원을 더 따랐으며 자신의 아버지인 세종을 “글만 볼 줄 아는 돼지”라고 대신들 앞에서 서슴없이 말했다는 기록도 있다. 성품으로 보아 피의 군주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고 태어나지 않았을까. 태종이 수양대군을 데리고 자신이 자주 가던 절을 찾았는데 그 절의 주지승이 수양대군을 빤히 뚫어보더니 “수양대군께선 상왕 전하를 쏙 빼닮으셨습니다.”란 말을 했다. 그 말을 들은 태종이 기분이 좋아서 어디가 그리 닮았느냐고 물었다. 주지승은 “운명”이라고 말했다. 왕권을 빼앗는 과정에서 자신의 할아버지 태종처럼 수양대군도 형제를 죽이며 손에 피를 묻힌다.

사육신 중 박팽년의 일화는 유명하다.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한 후 자신에게 `전하`라고 부르면 살려준다고 하자 “나리, 수양대군 나리, 나리 나리 개나리, 여자도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거늘 하물며 신하가 두 임금을 섬기겠습니까. 제게 `전하`는 어린 단종뿐입니다.”라고 하여 세조의 분노를 샀다.

영주시 단산면에 있는 소백산 고치령도 금성대군과 단종의 한이 서려 있는 고개이기도 하다. 단종을 복위시키고자 밀사들을 시켜 이 고치령을 넘나들게 했던 곳이다. 고치령 정상에는 단종과 금성대군을 모신 산령각이란 사당이 있다. 영월 사람들은 단종이 죽어서 태백산 산신령이 되었다고 믿었고, 영주 사람들은 금성대군이 죽어서 소백산 산신령이 되었다고 믿었다. 두 영정이 산령각에 모셔져 있다. 사람들은 소백과 태백 사이의 양백지간인 고치령에 금성대군과 단종의 혼이 만나는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순흥 고을에 사는 이 선달이란 이의 꿈에 금성대군이 나타나 “내가 흘린 피 묻은 돌이 죽동 냇물에 있으니 거두어 달라.”고 당부하면서 그 돌의 모양도 일러 주었다. 이튿날 마을 사람들과 함께 죽동 냇물을 뒤졌더니 과연 그 돌이 있었다. 구한말에 왜군들이 순흥에 쳐들어와 죽동 서낭당 앞에 침을 뱉고 배설을 하는 등 왜군들의 무엄한 짓거리가 극에 달했다. 이 무렵 어느 주민의 꿈에 금성대군이 나타나서 죽동 서낭당에 안치된 돌을 조용하고 정결한 자리로 옮기도록 일렀다. 이래서 금성대군의 혈석은 소백산 밑 두레골로 옮겨졌다.

▲ 김근혜<br /><br />대구 행복의 전화 소장
▲ 김근혜 대구 행복의 전화 소장
순흥 면민들은 해마다 정월 보름 새벽에 수송아지를 제물로 바치며 이곳에서 제를 올린다. 정월, 처음 열리는 장날에 수송아지를 흥정하지 않고 제값 주고 장만한다. 수송아지는 제삿날까지 `양반님`으로 불리며 금성대군의 화신으로 대접받는다. 선정된 제관들은 매일 죽계천에서 얼음을 깨고 목욕하며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뒤 제사를 지낸다.

어리석은 사람은 경험에서 배우고 지혜로운 사람은 역사에서 배운다는 말이 있다. 선조들의 삶을 돌아보며 한 수 배우고 옳고 그름도 알게 된다. 권력이란 참 묘한 놈이다. 발을 디디면 디딜수록 빠져드는 마약이다. 그 맛을 본 사람은 헤어나질 못하니 말이다. 그러다 보니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사람도 많다. 남의 권세를 빌려서라도 자신의 권력인양 위세를 부리고 싶은 게 인간의 마음인가 보다. 세조는 말년에 문둥병으로 죽고 그의 두 아들도 오래 살지 못했다. 현재의 내 모습은 지난날 내가 한 행동의 대가라고 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