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이석수가 남기고 싶은 이야기<12>

▲ 이석수 전 경북도 정무부지사

이제 사흘만 지나면 한해의 마지막달인 12월이 시작된다. 12월의 의미는 한해를 잘 정리하고, 새해를 잘 준비하는데 있을 것이다. 특히 사람들은 아무래도 새해에 거는 기대가 크다. 그래서 새해맞이 축제나 행사가 많은 곳에서 열린다. 포항에도 이러한 의미를 가장 잘 담고 있는 축제가 있다. 호랑이 꼬리에 비유되면서 한반도의 정기가 집약된 호미곶에서 열리는 `한민족해맞이축전`이 그것이다. 올해 마지막 날 밤부터 새해 첫날 아침까지 있을 이번 해맞이축제에도 많은 국민들이 호미곶을 찾아 개인의 소망과 국태민안을 함께 기원했으면 한다.

요즘 포항에는 해맞이축제를 시작으로 포항국제불빛축제 등 계절별로, 그리고 지역별로 크고 작은 축제들이 무수히 열리고 있다. 그러나 50여년 전만해도 포항지역은 축제의 불모지였다. 당시 시대적 상황에 따른 것이긴 했지만 이러한 축제의 불모지를 안타까워 하며 개척한 사람이 있다. 한반도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뜨는, 천하의 명당으로 불리는 호미곶 출신으로 영일군수와 구미시장을 지낸 서상은(徐相殷)씨다. 서 전 시장은 포항지역 최초의 축제를 만든 장본인이자 주역이라 할 수 있고, 그가 만든 축제는 오늘날 지역에서 열리는 각종 축제들의 초석이 됐다고 생각한다. 포항에서 처음으로 문화예술제, 즉 축제가 처음 열리기는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1964년이었다. 그해 10월 영일군이 보경사에서 `제1회 보경예술제`를 개최하여 농악경연대회 등을 가졌는데, 이 축제가 포항지역 축제의 모태이자 초석이 된 기념비적 축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축제는 당시 김옥현 군수마저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서상은 당시 영일군 공보실장은 관광홍보를 내세워 당시 매일신문사 황영수 포항지사장과 손덕호 보경사번영회장에게 이 축제의 필요성을 제안하기에 이른다. 문제는 `이런걸 왜하지`하며, 반응이 시큰둥하다는 것이었다. 서 실장은 두 사람에게 막걸리를 대접하며 집요하게 설득한 끝에 마침내 마음을 돌리게 만들었다. 축제를 위해 보경사 내연산 조교(弔橋:양쪽 언덕에 줄이나 쇠사슬을 건너지르고, 거기에 의지하여 매달아 놓은 다리)가 설치되고, 언론 홍보 및 광고는 황 지사장이 맡았고, 송라양조장을 경영했던 손덕호 회장은 막걸리 2섬을 내놓았다.

그리고 보경사 주지스님은 개막식 서제를 담당했다. 축제를 열기에는 열악한 환경 탓에 행사장은 김장섭 국회의원과 영일농협의 상품협찬이 전부였을 정도로 초라했다. 모든 여건이 미숙했지만 축제를 제안한 서상은 공보실장은 이 일로 몸무게가 쏙 빠질 정도로 열정적으로 매달렸다. 노력의 대가는 성공으로 돌아왔다. 이틀간에 걸쳐 보경사 입구 숲에서 열린 전국 농악경연대회가 순조롭게 마무리됐던 것이다.

이것이 포항최초의 축제인 보경예술제의 시작이었다. 기획 단계에서부터 마무리 단계까지 모든 과정을 주도한 서상은 전 공보실장은 아직도 포항에서 지역문화 창달에 자신의 한 몸을 던지고 있다. 실로 존경스럽다. 당시만 해도 포항 주변에서는 보경예술제보다 2년 전인 1962년부터 경주에서 열렸던 `신라문화제`가 거의 유일한 축제였다. 볼거리가 턱없이 부족하였던 때라 신라문화제에는 가을추수를 끝낸 주변 지역의 촌로들까지 모여들어 성황을 이루었다. 이듬해 10월 개최된 제2회 보경예술제는 `신라문화제` 못지 않았다. 보경사 경내에서 개최되었는데, 첫해보다 훨씬 큰 관심과 규모로 치러졌다. 당시 내무부에서 부임하였던 배수강 군수가 깊은 관심을 가졌고, 김인(仁) 경북도지사에게 이 축제를 보고하여 도비지원까지 받게 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개막식이 열렸던 보경사 대웅전 뜰에는 김인 경북도지사와 김판영 경북교육감을 비롯하여 도 단위 기관장은 물론 포항, 경주, 월성, 영덕, 영천 등 인근 도시의 기관단체장, 여기에 300여 스님들이 자리를 같이 했으니 그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 가능할터다. 실제, 보경사 내연산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도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일대 교통은 마비됐다. 포항시내 상가가 철시하는 상황까지 벌어졌으니 보경예술제의 위상이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1966년 초에 서상은 공보실장이 경북도청으로 이동하게 되면서 그해 10월 열린 세 번째 보경예술제는 축제를 만든 사람의 열정과 노력이 충분히 뒷받침되지 않은 탓에 그 수준과 위상이 크게 떨어졌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였던 예술제가 이후에는 아예 중단되고 말았다. 이러한 아픔과 위기를 겪었던 보경예술제는 훗날 보경문화제, 일월문화제 등으로 변모를 거듭, 오늘에 이른다. 다만, 포항항이 1962년 6월 12일 국제개항장으로 지정·선포된 것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제1회 포항개항제`가 1966년 7월 13일 전 시민의 참여 속에 성대하게 치러진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