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의 잊혀진 사상가를 찾아서
범부(凡父) 김정설과 다솔사(多率寺)

▲ 김정설, 최범술, 한용운, 김동리
▲ 김정설, 최범술, 한용운, 김동리

경남 사천시 곤명면 용산리 산 86 대한불교조계종 제14교구 본사 범어사 말사 다솔사(多率寺). 이 다솔사가 주목을 받은 이유는 일제 강점기 때 범부(凡父) 김정설(鼎卨.이하 범부)을 비롯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등이 이곳을 대한민국의 독립(獨立)을 위한 항일투쟁 거점지(據點地)로 활용했다는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특히, 이 사찰이 대한민국 근대사의 문화사적,사상적 발원지라 해도 무리가 없으며, 학계에서도 당시 상황을 재현하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다.

■ 다솔사와 인연 깊은 4人

김정설 항일투쟁 거점 삼으며 사상 연구 `일취월장`
최범술 독립지하조직 본산된 비밀결사 `만당` 창당
한용운 1917년~1918년 독립선언서 등 초안 작성
김동리
범부사상 계승… 문학의 거작 `등신불` 완성

다솔사는 최초 503년(신라 지증왕 4) 연기조사(緣起祖師)가 개창하면서 영악사(靈岳寺)라 했다. 636년(선덕여왕 5) 자장(慈藏)이 사우 2동을 짓고 다솔사(陀率寺)로, 다시 의상(義湘)이 676년(문무왕 16)에 영봉사(靈鳳寺)로 고친 것을 신라 말기 도선(道詵)이 불당 4동을 증축하면서 `다솔사`라 불렀다고 한다. 고려 공민왕 때 나옹이 중건하고, 조선에 들어와 사세를 유지하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가 숙종 때에 큰 중건불사가 행해졌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된 대양루(大陽樓:1748)를 비롯해 적멸보궁(寂滅寶宮)·응진전·명부전·선실·요사채가 있는 중요 사찰이다.

범부는 16세 때 고향인 경주에서 일제에 항거하기 위해 군중집회를 시도한 적이 있다. 그는 이 뜻을 이루지 못하자 경주 남문에 격문을 붙이고 청년들을 규합해 경주와 울산에 위치한 외동면 치술령으로 들어가 바위굴에서 생활하며 소규모 유격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이어 산사에 들어가 초막(草幕)에서 월남망국사(越南亡國史)를 읽거나, 다양한 병서를 탐독했다.

그의 항일의지는 광복 때까지 지속되면서 이 과정에 일경(日警)으로부터 불온사상가(不穩思想家)로 찍히는 등 요시찰대상(要視察對象)이 된다. 따라서 범부의 일제 강점기 행적에서 가장 두드러진 곳이 이 `다솔사`고, 천재적 재능을 타고난 그가 더욱 일취월장한 곳도 여기라 해도 무리가 없을 성하다.

그가 이곳으로 온 배경은 다솔사 주지 효당(曉堂) 최범술(崔凡述.1904~1979)과의 만남이다. 1934년 나이 38세에 다솔사에 들어간 범부는 이곳에서 일본 천태종 비예산문(比睿山門) 이하 대승직자(大僧職者)들과 대학교수단 40여 명을 대상으로 청담파(淸談派)의 현이사상강의(玄理思想講義)를 1주일간 진행했다.

여기서 식민지 국민이 어떻게 침략국의 지식인들에게 `사상`을 강의할 수 있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이는 살아있는 한국의 양심이자 지성인 김지하(芝河)가 범부를 두고 `하늘 아래 최고 천재`라 언급했듯이, 범부는 19세에 안희제가 설립한 백산상회 장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동경제대(東京帝大)와 경도제대(京都帝大) 등 굴지의 대학에서 청강하고 일본 학자들과 폭넓게 교류할 정도로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특히 그는 이곳에서 머무는 동안 해인사(海印寺) 사건에 연루되어 1941년과 1942년에 경기도 경찰국와 경남도 경찰국에 끌려가 장기간 감옥생활을 했다.

범부 외손자 김정근 전 부산대 교수가 “범부는 다솔사에 머무는 동안 수시로 일제 형사들의 방문을 받았고, 그때마다 형사들은 마루에 올라 일단 큰절을 하고 안부를 물었다”는 증언에서 보듯 요시찰대상자이지만 일경은 그에게 예(禮)를 갖추었다.

범부의 막내 동생 김동리도 생전에 백씨와 관련된 기록을 `망나니들과 어울리다`는 작품에 남겼다. “어느 날 아침 형이 경기도 경찰부로 붙들여갔다. 이유는 독립운동 운운(云云)이었다.형님이 경기도 경찰국으로 잡혀간 뒤부터 나는 가슴에 담이 붙고 소화불량증이 생겼다.(중략) 나의 병세는 형님의 구속과 석방에 따라 묘한 반응을 보여주었다.형님이 경기도 경찰국에 구속되어 있는 동안 갈비뼈 밑이 찌릿하게 아프고, 목구멍에서 무엇이 넘어오던 병세는 그해 가을 형님의 석방과 함께 씻은 듯이 나았다가 이듬해 봄 형님이 경남 경찰국으로 잡혀가는 것과 동시에 이번에는 다시 기침이 나기 시작했다.”

동리는 1934년 나이 22세 때 범부(당시 38세)와 같이 다솔사에 들어왔다. 동리에게는 범부가 `형`이 아닌 `스승`의 위치에 있었다.

김정근 교수는 “동리에게는 범부는 너무도 소중한, 거의 절대적인 존재였던 것 같다.범부의 아픔은 곧 동리의 아픔이었다”고 말한다.

 

▲ 경남 사천의 조계종 범어사 말사인 다솔사 전경.
▲ 경남 사천의 조계종 범어사 말사인 다솔사 전경.

동리는 사상적인 측면에서 백씨의 충실한 계승자였다. 그가 후일 임화계통의 경향파 문인들과 대립하며 논쟁을 벌일 때 `제3휴머니즘` 또는 `본격문학`이라고 하는 간판을 전면에 내 건 적이 있었다. 이 입장은 바로 백씨와의 교감 속에서 직조된 것이다. 동리도 이 절에서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등신불`을 완성했다.

다솔사를 깊이 들어가면 항일투쟁 본거지임이 확인된다. 당시 1930년대 다솔사 주지는 효당이다. 효당은 어린 나이에 출가해 일본 대정대학 불교과를 졸업한 신지식인이다. 그가 주지를 맡게 되면서 이 절은 독립지하조직인 만당(卍堂)의 본산이 되는 등 항일운동 은신처가 됐다. 한일합방 후 불교청년운동이나 유신회운동 등 공개적인 불교운동은 일제의 탄압 속에서 제대로 활동할 수가 없었다. 이에 공개적인 운동의 한계를 절감한 백성욱·김법린·김상호·이용조 등이 1930년 비밀결사를 조직하기로 합의해 여러 동지를 규합한 다음 비밀리에 창당선서를 하고 `당명`을 `만당`이라고 했다. 강령을 정교분립(政敎分立)·교정확립(敎正確立)·불교대중화 등을 채택했다. 이들은 입당 시 `비밀한사엄수 당의절대복종`(秘密限死嚴守 黨議絶對服從)의 서약을 했으며, 기록을 남기지 않기 위해 선언과 강령 모두 구송(口誦)했다. 당수로는 만해 한용운을 추대했으나, 만일의 경우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해 당사자에게는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만해는 1917년~1918년 이 사찰에서 독립선언서, 공약삼장 초안을 작성했고 환갑 기념으로 효당과 범부와 함께 황금편백을 식수하는 등 3인의 관계는 특별했다.

이처럼 다솔사는 일제 강점기 때 항일운동의 핵심세력들이 활동한 역사적 위치와 범부라는 위대한 사상가가 광복 이후 대한민국 호의 국민윤리, 건국철학 등을 제시하는 사상적 위치를 안고 있다.

또한, 김동리라는 한국의 대문호 작품 배경에 이곳의 흔적이 담겨져 있다.

정종섭 안전행정부 장관은 “사천 다솔사는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 부분이 많다. 그리고 이 사찰에서 일제 강점기 동안 이뤄졌던 사실을 심층적으로 발굴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윤종현기자 yjh0931@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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