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식 시인

`시몬, 나뭇잎 저버린 숲으로 가자 /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 낙엽 빛깔은 정답고 모양은 쓸쓸하다 / 낙엽은 버림 받고 땅위에 떨어져 있다 //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 가까이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가벼운 낙엽이 되리니 / 벌써 밤이 되고 바람은 우리를 휩쓴다 /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구르몽의 시 - `낙엽`중)

11의 형상은 낙엽이 파르르 떨어지는 것 같고 혹은 낙엽이 다 떨어진 앙상한 나뭇가지 같습니다. 누군들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 삶의 허무를 떠올리지 않겠습니까?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던 때 여드름 숭숭 난 까까머리 소년은 가을이면 심하게 가슴앓이를 했습니다. 그럴 때면 밤 새워 수신인 없는 연애편지를 쓰곤 했지요. 학창시절, 구르몽의 낙엽을 한번쯤 읊조리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가을이면 시몬은 우리 모두의 연인이었습니다. 오빠인가 하면 누이였고 선생님인가하면 누나였습니다.

그때는 흑백사진이 유행했습니다. 너도나도 사진관에서 증명사진을 찍었습니다. 사진을 여러 모양으로 편집해줬는데 조개껍질이나 낙엽을 실루엣으로 깔고 그 안에 넣어주곤 했지요. 펜팔 할 때면 그 사진을 주고받았습니다. 지금의 포토샵 기능 같은 것인데 분위기가 있어 실물보다 훨씬 나아보이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낙엽은 가끔씩 책갈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가을이면 단풍잎이며 은행잎, 감잎 등이 책장 사이에 피어나곤 했습니다.

`미라보다리 아래 세느강이 흐르고 / 우리들 사랑은 흘러간다 / 내 마음속 깊이 기억하리 / 기쁨은 언제나 고통 뒤에 오는 것 //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 세월은 흐르고 나는 남는다 //`(기욤 아폴리네르 시 `미라보다리` 중) 가을이면 가슴을 적시는 또 다른 시도 있었습니다. 기욤 아폴리네르의 `미라보다리`라는 시였습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미라보다리를 떠올리면 그 아래로 잔잔하게 청춘의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언젠가 어른이 되면 미라보다리를 걸어보리라 생각했습니다. 라라, 베르테르라는 이름처럼 미라보다리는 아련해서 아팠고 아파서 아련했습니다. 누구든 미라보다리라는 시를 읽으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세느강가를 걸어보고 싶지 않겠습니까.

“아직도 슬퍼?”, “전혀 슬프지 않아요. 당신 곁에 있게 돼 기뻐요”, “정말?”, “정말이에요. 어서 가요. 우린 여길 떠나야 해요”, “당신은 달아날 수 없어”, “아니에요. 이번엔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겠어요”, “그래 당신은 가면 안 돼”, “그래요”, “당신한테는 내가 있어. 모든 게 전혀 달라질 거야”, “네. 어서 가요” (한스 에리히 노자크의 소설 `늦어도 11월에는` 중) `늦어도 11월에는`은 비극적인 사랑이야기입니다. 전후 독일문학의 대표적 작품인 이 소설은 부(富)와 사회적 지위를 모두 갖춘 여인이 어느 날 가난한 소설가를 따라 가정을 떠난다는 줄거리입니다. 28세의 마리안네 부인이 자식과 남편을 버리면서 추구하고자 했던 것은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어떤 가치로도 충족되지 않는 인간의 근원적 욕망인 것입니다. 두 사람은 차를 타고 교외로 나갔다가 마주오는 차를 피하지 못하고 비극적 결말을 맞고 맙니다.

1970~80년대, 산업화시대를 살면서도 우리는 물질에 영혼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아름다웠고 꽃이 아름다웠으며 강과 하늘과 구름과 바람이 아름다웠습니다. 사랑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고 사랑을 위하여 무엇이든 할 수 있었습니다.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지금의 인스턴트사랑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또 한 해의 가을을 맞으면서 우리가 문명에 휘둘리지 않았을 때를 생각합니다. 마음이 순결하고 삶이 순정하고 세계가 순수하던 때를 생각합니다. 황금만능주의에 매몰되어 우리는 자신을 잃어버린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지나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순간, 인간이 물질에 종속되는 듯 보여도 물질은 결코 인간을 지배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곧 11월입니다. 낙엽을 밟으며 교정을 거닐던 시몬과 미라보 다리 아래를 흘러가던 사랑과 자유를 찾아 떠나간 연인들을 생각합니다. 쓸쓸하고 그리운 그것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