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진호 편집국장

날씨가 추워지니 부고장이 자주 날아든다. 아침저녁으로 기온 차가 큰 환절기가 되면 나이 든 어르신들이 이 세상을 견디기 힘겨워지시나보다고 짐작해본다. 지인의 어머니나 아버지 장례식장에 들어서며 상주에게 뭐라고 위로의 말을 권할까.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가 그저 “심심한 조의를 표합니다”하고는 물러선다. 부모가 돌아가신 마당에 무슨 말이 위로가 될 수 있으랴 생각해서다.

필자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벌써 26년이 지났다. 흔히 부모가 살아 계실 때는 얼마나 소중한 지, 얼마나 감사한 지를 모른다고 한다. 그러다 부모가 돌아가시고 나면 그 빈 자리를 느끼고 후회한다. 나도 그랬다. 각별히 아들을 사랑해주셨던 어머니에게 효도 한 번 제대로 못했는 데, 어느 날 갑자기 돌아가신 어머니.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을 찌르는 아픔을 느끼곤 한다.

남편이나 아내도 곁에 있을 때는 고마운 줄 모르는 게 사람이다. 필자는 서울 본부장으로 오래 근무하다가 본사 근무를 하게 된 지 2년여지만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는 자녀들 때문에 주말 부부로 지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불편한 게 한두가지가 아니다. 이런저런 불편을 느껴도 그러려니 하며 지나치기도 하지만 문득문득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고단함에 감상적이 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아내와 함께 있을 때 좀 더 살갑게 대해줄걸, 따뜻한 식사를 챙겨줄 때 고마운 마음을 좀 더 많이 표현해 줄 걸 하고 생각한다.

자녀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아이가 건강하면 공부 잘 하기를 원하고, 공부를 잘 하면 더 뛰어나기를 원한다. 세상 어느 부모가 제 자식에 대한 욕심이 없으랴. 늘 부족한 것만 보고 다그치다가 아이가 곁에서 떠나고 없으면 그동안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 지 깨닫게 된다.

며칠전의 일이다. 고3 수험생인 아들이 대학 공부가 아니라 음악에 승부를 걸고 싶다고 고집을 피웠다. 고교시절에 취미로 하라고 허락했던 록밴드가 아들의 마음을 크게 움직였던 모양이었다. 아내는 무척 속이 상했나 보다. 그렇게 이뻐하던 아들을 단단히 혼내줘야한다며 내게 다짐을 두는 것이 아닌가. 대학에서 열심히 공부해야 남부럽지 않은 직장을 잡을 수 있으련만 철없는 아들이 엄마 마음을 이해할 리 만무다. 아들은 그저 지금 음악하는 친구들과 언제까지나 함께 지낼 수 있기를 바라고 원할 것이다. 부모보다 친구가 더 좋을 나이라는 걸 나 역시 모르는 바 아니다. 나도 그런 시절을 지나왔으니 말이다. 그래서 내가 비록 경상도 특유의 가부장적인 아버지라 해도 아들의 열정(?)을 일방적으로 꺾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차에 경기도 성남시 판교에서 지하철 환풍구 붕괴사고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는 뉴스가 TV에서 흘러나왔다. 아내에게 말했다. “그냥 하나뿐인 아들, 몸 건강한 것만 해도 감사하고, 하고 싶으면 해보라고 기회를 줍시다.”아내도 말문이 막혔던지 그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저녁, 나는 조심스럽게, 때로는 약간 강압적인 목소리로 아들을 설득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대학 진학과 음악은 양립할 수 있으니 함께 병행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이다. 부모로서 포기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행히 고집 센 나와는 달리 착한 아들이었다.

반항심 가득한 그 시절, 나는 아버지가 바랐던 길은 무조건 싫다했다. 많은 세월이 흘렀다. 어린 시절 효자가 돼주지 않았던 필자인지라 뒤늦게 홀로 계신 아버님께 좀더 자주 전화도 드리고, 목욕도 함께 다녀야지 하고 마음을 다잡는다. 이젠 마음을 비우셨는 지 아버님 당신은 속으로 마땅치 않을 아들에게도 친구처럼 편하게 대하신다. 그러면서도 아버님은 농담같은 한 마디 일갈로 불효 자식인 이 아들의 정신을 번쩍들게 한다. “있을 때 잘해. 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