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식 시인

1. 제 안에 치명의 비상(砒霜) 하나 품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그대라는 이름이 아름다울 수 있을까요! 수평선 위로 고기잡이 불빛들이 피어나고 어떤 사랑은 벼랑 끝에서 돌아서지만 어떤 사랑은 벼랑을 건너가 꽃이 되기도 합니다. 끝내 어디론가 가야한다면 단 하나의 운명, 단 하나의 연민, 단 하나의 죄, 시든 포구의 이마 위로 달빛이 헤엄쳐오고 말더듬이 같은 아득한 분절음 속으로 걸어가면, 비로소 당신이라는 난파(難破) 곁에 내 난파 하나 오롯이 기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 올해도 어김없이 해국이 피었습니다. 구룡포 석병리에서 대보 대동배리까지. 해안가 벼랑 끝에 아스라이 돋을새김 된 저 꽃은 어떤 간절함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깎아지른 절벽을 붙들고 저처럼 처연히 서 있는 모습이겠습니까? 해국은 초겨울 꽃입니다. 구절초나 쑥부쟁이 등 국화과 무리들이 추위를 견디지 못해 그 빛깔을 잃고 스러지는 가을의 끝에서 오히려 절정을 이룹니다. 신(神)이 맨 처음 만든 꽃이 코스모스이고 나중에 만든 꽃이 국화라고 합니다. 국화 중에서도 해국은 가장 마지막으로 만든 꽃이 아닌가 싶네요. 해국의 어린잎은 식용하며 이뇨제 방광염 등에 약으로 사용하기도 한다지요. 기침이나 감기가 걸렸을 때 전초를 달여 먹이면 효능이 있다고 합니다.

3. 귀를 대면 잔털 송송 피어난 거기에서 파도소리가 들려옵니다. 어찌 파도뿐이겠습니까. 보랏빛 꽃잎 안에 바다가 오롯이 다 들어있지요. 해안가로 촤르르 헤엄쳐오는 멸치 떼며, 갯바위 위로 소풍가는 맵살고둥이며, 모래밭 위로 날아오르는 괭이부리 갈매기들이며. 그뿐이겠어요. 연등처럼 반짝이는 채낚기불빛이며, 소금기 묻은 샛바람이며,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별똥별도 숨어 있습니다. 그러니 꽃잎 한 장 한 장은 연금술사가 제련한 보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비와 바람과 햇살에 담금질한 저 브로치 같은 것을 그대의 가슴에 꽂아주고 싶습니다. 그러면 쓸쓸한 당신의 가을도 보석처럼 환하게 빛나겠지요.

4. 옛날 어느 바닷가에 금슬 좋은 젊은 부부가 살았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둘은 사소한 일로 다투게 됐고 남편은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떠났답니다. 며칠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아내는 딸을 데리고 갯바위 위에서 남편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다 그만 높은 파도에 휩쓸려 목숨을 잃게 되고 말았습니다. 얼마 뒤 날씨가 나빠 잠시 다른 섬에 피항해 있던 남편이 돌아왔을 때 아내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듬해 늦가을 남편은 높은 바위에 앉아 바다를 쳐다보다가 웃고 있는 꽃을 발견했답니다. 들여다보니 아내와 아이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해국의 꽃말은 기다림입니다. 벼랑의 패인자국은 어쩌면 남편과 아내와 아이의 눈물자국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바위틈을 비집고 피어난 꽃을 보면 전설의 애틋함이 묻어날 듯합니다.

5. 당신은 그 꽃을 마침표 같다 말했고 나는 쉼표라고 했습니다. 모든 꽃들이 자신의 생을 개화로서 마치지만 그건 다음 생을 위한 과정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생이 하나의 생으로 끝나지 않고 다음 생을 위한 전초가 된다는 건 당연한 생명법칙이지요. 그러니 오늘 벼랑 끝에 피어난 저 해국을 끝이라고 하지 맙시다. 어떤 길들은 벼랑 앞에서 돌아서지만 어떤 길들은 벼랑을 건너 바다에 이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꽃도 저러할진대 하물며 사람이겠습니까. 지금 힘든 상황들이 우리를 가로막는다 해도 해국처럼 끝끝내 절망을 이기고 꽃을 피워내야 할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칠흑 같은 절망을 건너가고 있는 당신을 오늘은 해국이라 부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