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시 사벌면 화달리 마실

▲ 사벌왕릉 사당인 숭의각과 화달리 3층 석탑.
▲ 사벌왕릉 사당인 숭의각과 화달리 3층 석탑.

논두렁을 덮고 물결치는 은빛 억새들의 군무가 장관이다. 그 자체로 그림이 되는 들녘, 가을이 지닌 풍경이다. 난데없는 강풍이 몰아친다. 몸조차 가눌 수 없이 휘청거리지만 억새는 부러질 듯하면서도 굽히지 않는 기품을 지녔다. 매딥매딥에서 들려오는 서걱거림, 한 계절이 가고 있다.

나비 부인의 기를 살려주지 않았더니 보란 듯이 다른 길로 안내한다. 게으른 주인에 대한 경고가 따끔하다. 자칫 경북대학교 상주 캠퍼스에서 내 젊은 날의 추억만 회상하다 돌아올 뻔했다. 길을 잃으면 길을 발견한다고 하지 않던가. 길이 없다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헤매다 보면 새로운 길을 개척하게 된다. 인생은 헛길로도 가봐야 바른길로 갈 수 있는 지혜도 생긴다. 시행착오는 돌아보면 삶의 조각으로 나름의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해내고 있는 것을 발견할 때가 있다.

상주시 사벌면 마실을 찾았다. 문화해설사를 운 좋게 만났다. “우선 상주에 대해 기본적인 것부터 살펴보도록 하죠. 상주는 쌀, 누에고치, 곶감이 유명해서 삼백의 고장이라 불러요.” “질문해도 되나요. `삼백`의 `백` 자는 `흰 백` 자인 것 같은데 곶감이 흰색인가요.” “아, 그거요,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곶감이 분이 나면 하얗게 되잖아요. 아마도 그래서 선조들이 `흰 백` 자를 썼지 싶네요. 상주는 보다시피 들이 아주 넓죠. 당연히 농업이 터전이었겠죠. 경북 농업의 중심지라 볼 수 있었어요. 조선 시대에는 경상감영이 있던 곳이기도 하구요. 경주와 상주 고을의 첫 글자를 하나씩 따서 경상도라 지었다는 건 다 아시죠.”

상주의 옛 지명은 상산으로 본래 삼한시대에 진한의 영토였으나 185년 사벌국으로 독립해 오다가 신라 첨해왕 때 정벌 되어 상주로 고쳐 군주를 두었다. 낙동강은 사벌국의 도읍이었던 낙양에서 유래했다. `낙양의 동쪽에 와서야 강다운 면모를 갖추고 흐른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 고을에서 세 나라의 왕을 배출한 지역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경……주.” “아니에요, 허허, 모르겠죠. 상주뿐입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전사벌왕릉의 사벌국과 함창 고령가야국, 그리고 후백제의 견훤이 상주 사람이죠. 그래서 상주 사람들은 자부심이 대단해요.” “우와 그러면 제 조상의 뿌리도 상주네요. 전 고령가야 후손인데요. 허허.”

사벌국은 사벌면 화달리 일대에 존재했던 고대 삼한의 소국이었다. 동국여지승람에 사벌국의 옛 성이 병풍산에 있는데 신라 말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가 이 성에 웅지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나라는 본래 신라에 속하여 있었으나 갑자기 배반하여 백제에 귀속하였다. 그러자 석우로(于老)가 군대를 거느리고 이를 토벌하여 사벌주를 설치하였다. 그 뒤 신라 54대 경명왕의 여덟 왕자 중 다섯 번째 왕자인 박언창이 사벌주의 대군으로 책봉되어 사벌국이라 칭하고 11년간 이 지역을 통치하였다. 그 뒤 후백제 견훤(甄萱)의 침공을 받아 929년 패망하였다.

상주 지명유래 총람에선 상주의 사벌이나 경주의 서벌은 수읍(首邑)을 뜻한다고 했다. 사벌을 동쪽 나라 또는 동쪽의 머릿고을로 풀이한 학자도 있다. 상주의 향토지인 상산지에 따르면 사벌국 고성이 병풍산에 있으며 성 옆에 높다란 언덕이 있으니 예로부터 사벌왕릉이라 전한다고 기록돼 있다.

전사벌왕릉은 경상북도 기념물 제25호이다. “사벌국은 낙동강과 인접해 있고 평야가 비옥해서 쌀이 많이 생산되었다고 해요. 주변 국가와 쌀이나 농산물을 교역했을 가능성도 보이며 경제적으로도 부강한 나라였을 것으로 추정하죠. 고고학계는 사벌국이 부족국가 형태에서 멸망까지의 시기를 기원전 2세기경에서 4세기대로 보고 있어요.”

“기원전 108년 고조선의 멸망과 낙랑군의 성립 등 불안정한 국제 정세가 농경사회를 사벌국이라는 국가 체제로 발전시키는 데 자극제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하죠.” “사벌국은 신라에 패했잖아요.” “비록 사벌국은 멸망했지만 사벌주는 신라의 군사적 요충지이자 전진기지였을 뿐만 아니라 군주를 임명할 만큼 큰 비중이 있었던 소왕국이었어요. 사벌주는 수도인 경주와 버금가는 대 세력 집단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걸 여러 자료를 통해 짐작할 수 있어요.” “궁금한 거 없나요.” “사벌왕릉 앞에 붙은 전(傳)자는 무슨 뜻인가요.”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전설상 왕릉으로 전해오나 정사에는 기록이 없어 누구의 묘인지 추정이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1672년 목사 이초로의 꿈에 신인이 나타나 이 묘소가 사벌왕릉이라고 일러줬다는 전설도 있다.

 

▲ 김근혜<br /><br />대구 행복의 전화 소장
▲ 김근혜 대구 행복의 전화 소장

후삼국 시대 수많은 호족이 일어났다 사라졌다. 주페의 `경기병` 서곡이 잔잔히 능 위로 흐른다. 낯선 감이 없잖아 있지만 역사 속 또 하나의 왕을 보고 간다. 행운을 거머쥔 자와 때를 얻지 못한 자의 엇갈린 희비가 후둑 밀려든다. 나는 나그네살이를 마감할 때 나에게 아직도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 남았는가를 물어보려 한다.

능 옆으로 상산 박 씨 재실과 국가지정 문화재 보물 제117호 3층 석탑이 있다. 둔진산 남쪽 부근의 지형으로 미루어 이곳에 남향 사찰이 건립되었던 가람의 자리가 아닌가 하는 추측설이 있다. 탑기단 위에 목 없는 불상이 전율을 일으킨다.

성불은 완전한 모습이 아니라 미완의 미학이라는 듯 고요한 가르침을 준다. 찬란했던 영화도 치욕스러웠던 과거도 무덤 속 주인은 알 리 없다. 그저 초원에서 곤히 잠자고 있다. 여행은 길 위의 학교라 했다. 가보지 못한 곳도 막연하게 알고 있던 것도 발을 디디면 산지식이 된다. 멈추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면서 여행에서 사는 법을 배운다. 상주에서 내 뿌리를 찾았다. 영혼이 넉넉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