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수가 남기고 싶은 이야기(3)

▲ 이석수 전 경북도 정무부지사

6·25전쟁 이후 미국의 원조는 모든 것이 여의치 못했던 우리 형편에 가뭄의 단비와 같은 것이었다. 우리나라는 1960년대까지도 이러한 형편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특히 의식주의 기본이 되는 식량이 크게 부족했다. 그래서 지방행정의 중심은 단연코 농정 관련 업무들이 차지했다. 필자가 1965년 당시 영일군청에서 근무했던 양정(糧政)계도 농정 중요부서 중 하나였다. 식량의 수급과 유통, 가격 등 식량정책을 관리했는 데, 당시 구호물자였던 외국원조미(미국잉여농산물)가 동빈부두(포항항)에 하역되면 도정 업무를 도맡아 했다.

동빈부두는 동해안 수산업 전진기지 중 하나에 불과했지만 6·25전쟁 기간과 직후에는 군수물자와 인력을 수송하는 군사항으로, 1962년 6월에는 국제항으로 개항하면서 외국선박과 외국원조미를 운반하는 대형선박이 입항하는 등 당시에는 우리나라 식량공급의 창구역할을 담당했다.

외국원조미는 보통 한 번에 2만여 t이 들어왔는 데, 지역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외국 원조미 중 6할은 입항지인 포항지역에서 도정하고, 나머지 40%는 인근 경주와 영천, 영덕 등으로 분산하여 도정하였다. 당시 산업이 워낙 빈약했었기에 도정업자들은 지역경제를 쥐락펴락했다. 당연히 돈도 많이 벌었다. 포항 부자를 대표한 이들은 지역에서 세금을 가장 많이 냈고, 은행에도 큰 손이었다. 포항의 김유, 최귀돌, 홍봉춘, 정명바우(삼화압맥 사장)씨를 비롯해 영일 흥해의 이장우·배수성·김석암 씨, 연일 박병일, 대송 이영준, 기계 박용수, 청하 정기수씨 등이 그 대표적 인사였다.

특히 지금의 중앙상가 영남병원 옆에 자리했던 삼화압맥공장은 전국 최대 규모를 자랑할만큼 명성을 날렸다. 압맥(壓麥)은 기계로 납작하게 누른 납작보리를 말하는데, 보리에 적당한 수분과 열을 가해 눌러주었기 때문에 통보리보다 밥을 지을 때 연료가 적게 들고 소화율도 좋았다. 연료부족이 심각했던 당시 군대에 공급되었던 압맥의 대부분은 삼화압맥에서 생산된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나온 겨는 경주를 전국 최고의 축산지로 만드는데도 일조했다.

외국원조미가 지역경제에 끼친 영향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포항을 전국 최대의 가마니와 새끼 생산지로 거듭나게 만들었다. 당시 흥해를 비롯한 포항지역은 일찍부터 가마니와 새끼 생산지로 유명했다. 어장을 막고 그물을 내리는 데 전적으로 이들을 사용하였기에 기술이 앞서 있었던 것. 원조미를 싣고 온 선박의 창고에서 벼를 하역하려면 1t에 보통 14장의 가마니가 필요했는 데, 외국원조미 2만 t이 하역될 때마다 가마니 28만장과 상당한 양의 새끼가 필요했다. 이를 포항지역에서 전량 조달했다. 당시 흥해에서만 일주일에 평균 5천여 장의 가마니를 생산했었을 정도로 엄청난 양이었고, 부업농가들은 알게 모르게 주머니를 짭짤하게 채웠다. 또한 하역 때마다 진풍경이 벌어지곤 했다. 보통 20~30명의 인부들이 하역작업에 참여했는데, 이들은 큰 장화를 신고 보관창고에 들어가 나올 때는 장화에 벼를 가득 채워 나오곤 했다. 이를 모으면 하루 평균 1인당 30㎏은 족히 되었는데, 모두 인근식당 등으로 비공식 운반되었다.

이처럼 밀반출된 양도 많았지만 하역 기술과 장비가 턱없이 부족했던 당시에는 작업과정에서 낙곡이 많이 발생했다. 하역장 모래자갈밭에는 이 낙곡을 주워 끼니에 보태는 사람들로 북적이기도 했다. 이렇게 외국원조미는 당시 하역 인부들과 인근 주민들에게 소소한 소득이 되기도 했다.

외국원조미가 동빈부두에 하역된 것은 동해안 지역의 미곡생산이 평야가 많은 호남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족, 포항과 경주 등에 원조해 줄 수요자가 많았기도 하지만 항구가 있어 군량미 공급이 용이하였던 점도 한 몫했다. 또 당시 포장에 필요한 가마니와 새끼가 전국 주요 생산지라는 부분도 하역기지로 선정되게 하는데 한 요인이 됐다. 외국원조미는 우리의 식량사정을 완화시켜 국내의 곡물가격을 안정시켰는데 포항이 그 중심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