⑸ 이 황

▲ 안동시 도산면 양진암 뒷산에 있는 퇴계 이황의 묘역은 조선 대철학자이자 한국이 낳은 최고 사상가의 성품처럼 단아하다.

`선성(先聖)에게 빛을 던져 선성의 학(學)을 후학의 사람들에게 베푼 동방의 나라에서 오직 한 분`<이덕홍> `주자(朱子)의 직제자(直弟子)와 다름없다.조선의 일인(一人)` (일본 기몬학파 창시자 야마사키(山崎暗劑)> `아득하셔라 이부자(李夫子)님이시여,당신은 성인(聖人)입니다`<중국 개화기 대표적인 사상가 량치차오(梁啓超)>

조정 부름 수십차례나 고사, 고향 안동서 학문·제자훈도
임진왜란때 문집 반출… 日 주류사상계에 독보적 영향
묘비문 과장·왜곡 우려, 자신이 직접 96자로 직접 지어

 

▲ 이황 영정
▲ 이황 영정

더 이상의 극찬은 없다. 한국이 나은 최고의 사상가이자 학자이며,조선 3대 석학인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두고 동양권 학자들이 뱉은 말이다. 동양 3국의 도의철학(道義哲學)의 건설자이며 실천자인 이황(1501~1570). 임진왜란 후 그의 문집은 일본으로 반출되어, 도쿠가와가 집정(執政)한 에도(江戶)시대에 그의 저술 11종 46권 45책이 `일본각판`으로 복간되었다. 일본 근세 유학의 개조(開祖) 후지와라(藤原惺窩) 이래로 이 나라 유학 사상의 주류인 기몬학파(崎門學派) 및 구마모토학파(熊本學派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고, 이황은 이 두 학파로부터 대대세세(代代世世)로 신명(神明)처럼 존숭을 받아왔다.

조호익은 그의 `학적지위`를 이렇게 평가했다. “주자가 작고한 뒤 도의 정맥은 이미 중국에서 두절되어 버렸다.퇴계는 한결같이 성인의 학으로 나아가 순수하고 올바르게 주자의 도의를 전하였다.우리나라에서 비교할 만한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이만한 인물을 볼 수 없다. 실로 주자 이후의 제일인자이다”

퇴계의 성장 과정은 정상적이 아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인으로 추앙받는 것은 교육에서 비롯됐다. 그는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현 경북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좌찬성 이식의 7남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생후 7개월 만에 아버지는 사망하고 어머니인 춘천 박씨의 훈도 밑에 총명한 자질을 키웠다. 12세에 작은아버지 이우로부터 `논어`를 배웠고,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해 특히 도잠(陶潛)의 시를 사랑하고 그 사람됨을 흠모했다. 18세에 지은 `야당(野塘)`이라는 시는 그의 가장 대표적인 글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20세를 전후하여 `주역`에 몰두한 탓에 건강을 해쳐서 그 뒤부터 병치레가 끊이지 않았다.

1527년(중종 22) 향시(鄕試)에서 진사시와 생원시 초시에 합격하고, 어머니의 소원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고자 성균관에 들어가 다음해에 진사 회시에 급제하였다. 1533년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金麟厚)와 교유하고, 심경부주(心經附註)를 입수하여 크게 심취하였다. 이 해에 귀향 도중 김안국(金安國)을 만나 성인군자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33세에 문과에 급제한 그는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면서 첫 공직을 시작했다. 3년 후 어머니 상을 당하자 향리에서 3년간 복상했고, 38세에 홍문관수찬이 되었다가 곧 임금으로부터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은택을 받았다.

중종 말년에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관계(官界)를 떠날 것을 결심한다.하지만 조정은 그를 1543년 10월 성균관 사성으로 승진시켰는데, 그는 성묘를 핑계 삼아 사가를 청해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을사사화 후 병약함을 구실로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1546년(명종 1) 고향인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의 동암(東巖)에 양진암(養眞庵)을 얽어서 산운야학(山雲野鶴)을 벗 삼아 독서에 전념하는 구도 생활에 들어갔다. 이때에 토계를 퇴계(退溪)라 개칭하고,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 퇴계는 자신이 죽기 전에 직접 비문을 썼다.선조가 영의정으로 추증했지만 그는 제자들에게 절대 이 직책을 못쓰게 하는 유계를 내렸다.
▲ 퇴계는 자신이 죽기 전에 직접 비문을 썼다.선조가 영의정으로 추증했지만 그는 제자들에게 절대 이 직책을 못쓰게 하는 유계를 내렸다.

초야에 묻혀있는 그에게 조정은 수 차례 등청을 요구했다. 그러자 그는 당시 부패하고 문란한 중앙의 관계에서 떠나고 싶어서 외직을 지망, 48세에 충청도 단양군수가 되었다. 그러나 곧 형이 충청감사가 되어 옴을 피해, 봉임 전에 청해서 경상도 풍기군수로 전임하였다. 단양군수 재직 때 그는 관기(官妓) 두향과 사랑에 빠진다. 그의 나이 48살,두향은 18살이었는데 그녀가 먼저 퇴계에게 러브 콜을 했지만 처신이 너무 곧은 것 때문에 두향의 애간장을 태웠다. 그 당시 그는 부인과 아들을 잇달아 잃었다. 그런 그의 빈 가슴은 설중매와 같았던 두향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시와 서예 그리고 가야금에 능했고, 특히 매화를 좋아했다. 그래서 퇴계의 작품 중에는 매화가 많이 등장한다.

풍기군수 재임 중 주자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부흥한 선례를 좇아서, 고려 말기 주자학의 선구자 안향(安珦)이 공부하던 땅에 전임 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扁額)·서적(書籍)·학전(學田)을 하사할 것을 감사를 통해 조정에 청원하여 실현을 보게 되었다. 이것이 조선조 `사액서원(賜額書院)`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1년 후 퇴임하고, 어지러운 정계를 피해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寒棲庵)을 지어 다시금 구도 생활을 하다, 51세에 성균관 대사성의 명을 받아 취임하였다. 55세에 홍문관부제학, 57세 공조 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여러 차례 고사하였다. 1543년 이후부터 이때까지 관직을 사퇴하였거나 임관에 응하지 않은 일이 20여 회에 이르렀다.

59세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이라 정했다. 이로부터 7년간 서당에 기거하면서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를 훈도하였다.

명종은 예(禮)를 두터이 해 자주 그에게 출사(出仕)를 종용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에 명종은 근신들과 함께 `초현부지탄(招賢不至嘆)`이라는 제목의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도산에 보내 그 풍경을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 그것에다 송인(宋寅)으로 하여금 도산기(陶山記) 및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써넣게 해 병풍을 만들어서, 그것을 통해 조석으로 이황을 흠모했다 한다. 그 뒤 친정(親政)하게 되자, 이황을 자헌대부(資憲大夫)·공조판서·대제학이라는 현직(顯職)에 임명하며 자주 초빙했으나, 그는 그때마다 고사하고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1567년 명나라 신제(新帝)의 사절이 오게 되자, 조정에서 이황의 내경(來京)을 간절히 바라 어쩔 수 없이 한양으로 갔다.

 

▲ 퇴계의 모(母) 춘천 박씨가 그를 임신했을 때 공자가 문에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고 하여 붙여진 성임문(聖臨門).
▲ 퇴계의 모(母) 춘천 박씨가 그를 임신했을 때 공자가 문에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고 하여 붙여진 성임문(聖臨門).

명종이 돌연 죽고 선조가 즉위해 그를 부왕의 행장수찬청당상경(行狀修撰廳堂上卿) 및 예조판서에 임명하였다. 하지만 신병 때문에 부득이 귀향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황의 성망(聲望)은 조야에 높아, 선조는 그를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우찬성에 임명하며 간절히 초빙하였다. 그는 사퇴했지만 여러 차례의 돈독한 소명을 물리치기 어려워 마침내 68세의 노령에 대제학·지경연(知經筵)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를 올렸다. 선조는 이 소를 천고의 격언, 당금의 급무로서 한순간도 잊지 않을 것을 맹약했다 한다. 노환 때문에 여러 차례 사직을 청원하면서 왕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서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저술하여 어린 국왕 선조에게 바쳤다. 1569년(선조 2)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번번이 환고향(還故鄕)을 간청해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환향 후 학구(學究)에 전심하였으나, 다음해 11월 종가의 시제 때 무리를 해서인지 우환이 악화되었다. 그달 8일 아침, 평소에 사랑하던 매화 분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킨 후 일으켜 달라 해 단정히 앉은 자세로 역책(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하였다.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여 애도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 겸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영사를 추증하였다.

장사는 영의정의 예에 의하여 집행되었으나, 산소에는 그의 유계(遺誡)대로 소자연석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새긴 묘비만 세워졌다.

퇴계는 자신이 죽기 전 비문을 직접 지었다. 이유는 제자나 지인이 쓸 경우, 꾸미고 과장될 우려를 했기 때문이다.

묘비명은 대철학자답게 자신의 생애를 4언 24구 96자로 압축한 것으로 조그만 돌에다 새기게 했다. 1570년 12월 8일, 향년 70세를 일기로 성인 퇴계는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