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현의 역사인물탐구
⑷ 김유신

▲ 경주시 선도산 자락에 있는 김유신 묘는 신라의 무덤 중에서 가장 호화롭게 조성됐다. 봉분은 지름이 30m로 봉분 아래에는 둘레돌을 배치하고 다시 난간을 둘렀다. 둘레돌에는 12지신상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이것은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 시대 12지신 조각 중 가장 뛰어나고 섬세한 것이다.

우리나라 전쟁 `영웅(英雄)`을 꼽는다면 으뜸이 신라 김유신(庾信) 장군이다.

김유신 장군은 한반도를 영역으로 한 우리나라를 최초로 통일국가를 이룩한 주인공이다.

전쟁사 측면에서 볼 때 가장 약소국이면서 적대국가를 무찌른 것은 강력한 지도력과 국민 근성이 함께한 합작품이다.

특히 왕(王)이 아니면서, 죽어서 왕(王) 칭호를 받은 유일한 이가 `유신`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정치군인이란 비판도 있지만 투철한 국가관의 소유자여서 현재에까지 그의 정신이 이어지고 있다.


몰락한 가야왕조 후손… 전쟁 공로로 입지 구축
김춘추와 연합해 정국 주도하는 핵심 실세로 부상
죽어서 `왕` 칭호… `유신참마` 등 많은 일화 전해져


김유신은 경주(慶州) 김씨(金氏)가 아닌 경남 김해 지역을 근거로 한 가야(伽倻) 김씨다. 금관 가야의 마지막 왕 구형왕, 그가 바로 김유신의 증조부다. 따라서 유신은 몰락한 가야 왕조의 후손이다.

당시 삼국이 분리된 상황에서 당시 신라 진흥왕의 영토 확장 정책으로 군사적인 능력을 가진 인물이 필요했다.

여기에 유신의 선조들은 신라 진골(眞骨)층에 편입되어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

그리고 그의 할아버지 무력은 나·제동맹을 깨고 고구려의 한강 유역을 점령한 공로와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을 전사시켜 신라 최고의 관등인 각간에까지 올랐다.

재미있는 것은 유신의 부모인 서현과 만명 부인 간의 결혼이다.

만명은 진흥왕의 동생인 숙흘종의 딸인 왕족이다. 보수집단인 신라 권력층과 편입된 진골과의 혼인과정은 `로미오와 줄리엣`에 버금간다.
 

▲ 김유신 장군 영정
▲ 김유신 장군 영정

삼국사기에 그 일화가 전한다.

서현을 만나 첫눈에 반한 만명.

만명은 아버지의 반대로 집안에 감금된다. 이런 가운데 서현은 만노(현 충북 진천) 군수로 발령나자 만명은 도망쳐 나와 동행한다. 이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아이가 유신이고, 그의 태생지는 만노다. 이로써 서현도 신라 권력층에 다가선다.

유신도 아버지와 같이 신분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전쟁터에서 공을 세우는 것이었다.

15세에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龍華香徒)라 불리던 자신의 낭도(徒)를 이끌었다.

그의 최초 전공은 34세 때 고구려와의 낭비성(娘臂城) 전투에서다. 신라는 1차 접전에서 패배하여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이때 중당당주(中幢幢主)로 출전한 그는 단신으로 적진에 돌입하여 유린함으로써 신라군의 사기를 북돋워 크게 승리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가 정치 및 군사적으로 입지를 구축한 전투는 대야성(현 경남 합천)이다.

642년(선덕여왕 11) 7월 백제 의자왕(義慈王)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 서쪽의 40여 성을 함락시켰으며, 8월에는 고구려 군사와 연합해 신라의 대중국교통 거점인 당항성(黨項城.현 경기도 화성시)을 공격해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을 죽이는 등 신라가 대패했다.

이때 유신과 김춘추의 진가가 발휘된다.

유신은 `군사`, 춘추는 `외교`로 역할을 분담하면서 춘추는 당(唐)나라에서 20만 명을 지원받았다. 대야성에 밀려난 신라는 압량주(현 경북 경산)에 최전선을 구축하면서 사령관으로 유신이 되었다. 유신은 여기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 백제의 가혜성(加兮城)을 비롯한 7성을 함락시키는 등 상실된 대야성 지역은 그에 의해 점차 탈환되어 가고 있었다.

백제로부터 빼앗은 지역은 그의 군사적인 기반이 되었고, 특히 선덕여왕의 정치적 위상을 강화시켜 주는 데 큰 몫을 했다.

이로써 유신은 `군권`, 춘추는 `외교권`을 장악하면서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급부상했고, 이후 양자가 연합해 새로운 왕실의 핵심세력을 형성했으며, 삼국통일(三國統一)이란 대업을 거두었다.

당시 그의 리더십에 대한 일화다.

원정에서 돌아오자마자 백제가 매리포성(買利浦城)에 침입하였다는 급보를 받고, 가족도 만나지 않은 채 다시 출전하여 승리했다. 그 해 3월에도 귀환하기 전에 또 백제의 침입으로 출동하였는데, 그는 전열을 정비하여 즉시 떠나게 되자 문밖에 나와 기다리는 가족들을 돌아보지도 않고 50보쯤 지나쳐 말을 멈춘 뒤, 집에서 물을 가져오게 하여 마셨다. 그리고는 “우리 집 물이 아직도 예전 같은 맛이 있다”고 말하고 출발했다. 이에 군사들은 “대장군도 이러하거늘 우리들이 어찌 가족과 떨어짐을 한스럽게 여기겠는가” 하고 분발하자, 백제군이 그 기세만 보고도 퇴각하였다고 한다.

유신의 비극적인 러브 스토리에서도 국가관(國家觀)이 묻어 나온다.

젊은 날에 화류계 절세미인 천관이 운영하던 기방에 다니면서 그녀와 사랑에 빠졌다. 이 일을 안 어머니 만명부인은 유신에게“치국평천하( 治國平天下)를 꿈꾸는 사람이 주색에 빠져서 어찌 큰일을 이룰 수 있겠느냐” 며 크게 질책했다. 이후 그는 천관의 집에 발길을 끊기로 다짐하고 무예와 학문에 열중했다. 그러다 유신이 전쟁터에서 승리하고 귀환하던 중 말 위에서 졸고 있는 사이 애마(愛馬)가 습관적으로 천관의 집에 가자 칼로 말 목을 베어버렸다. 이것이 유신참마(庾信斬馬)다.
 

▲ 김유신 묘비에는 개국공순충열흥무왕릉(開國公純忠烈興武王陵)으로 적혀 있다.
▲ 김유신 묘비에는 개국공순충열흥무왕릉(開國公純忠烈興武王陵)으로 적혀 있다.

선덕여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진덕여왕 1년에 상대등이었던 비담이 명활성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상대등은 귀족의 대표로 왕위에도 오를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비담이 난을 일으킨 구실은 `여자는 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는 명분이었다.

그러나 유신은 이 난을 평정하면서 권력층을 입성한다.

진덕여왕이 사망하자 마침내 김춘추(태종무열왕)가 왕위에 오른다. 드디어 보수 귀족 세력에 맞서 소수 개혁파 세력이 승리하면서 그는 대각간에 오르고 65세 때 귀족회의 수장인 상대등이 되는 등 정국을 주도하는 실세로 부상했다.

춘추는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는 `주류`는 아니었다. 이 두 사람의 연결은 이미 아버지 대부터 시작됐다. 유신 아버지인 서현과 춘추 아버지 영춘은 낭비성 전투를 함께 이끈 동지였다. 진지왕이 왕위에서 폐위되면서 왕이 될 수 없었던 춘추 집안과 패망한 나라의 왕족이었던 유신 집안. 엄격한 신분제 사회 신라에서 두 집안은 `비주류`라는 공통점이 두 집안을 결속시키는 촉매제가 됐다.

또한, 혼맥도 이어진다. 춘추의 부인은 유신의 동생 문희다. 또 유신 부인도 춘추의 셋째 딸이다.

승승장구하던 유신이 65세 때 철천지원수였던 백제를 당나라와 연합하여 멸망시키자, 당 고종은 그에게 봉상정경평양개국공(奉常正卿平壤郡開國公)으로 봉했다.

이어 73세 때 고구려를 정벌하는데, 나당 연합군 사령관 격인 대총관이었지만 고령으로 출전하지 못하고 대신 무열왕이 전쟁에 참가하고, 그는 국내 통치를 맡았다. 고구려를 멸한 뒤 그는 태대각간(太大角干)으로 승진하고서 직접정치나 군사활동을 안 하고 지배층의 원로로 내부 단결과 전략수립 등 자문역을 했다.

당 나라는 백제 등이 멸망하자 백제에는 웅진도독부를, 고구려 평양에는 안동도호부를, 신라 본토에 계림도독부를 두어 삼국 전체에 지배권을 확보하려 했다. 유신은 당의 침략에 맞섰지만, 당대에는 물리치지 못하고 그가 죽은 뒤 문무왕 때 당의 군대를 대동강 이북으로 몰아냈다. 그는 79세 일기로 임종했다.

지금도 김유신 장군은 전국 곳곳에서 호국신(護國神)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그는 분명 영웅 중의 영웅이 틀림없다.

/윤종현기자 yjh0931@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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