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 자인면 일언리 마실

▲ 경산시 자인면 일언리 마실.
▲ 경산시 자인면 일언리 마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내 차는 달린다. 노란 우산에 노란 장화를 신은 꼬마가 자박자박 걷는다. 빗물이 통통 튕긴다. 꼬마 뒤를 따라 할머니도 저벅저벅 따라 간다.

한참을 달려도 목적지가 안 나온다. 나비부인의 머릿속에는 입력되지 않은 길이다. 어림짐작으로 나선 길이라서 나비부인을 탓하지도 못한다. 막다른 골목길에 부딪히는 상황을 되도록 만들지 않지만 인생살이에서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길을 만날 때가 더러 있다. 그럴 땐 참 난감하다.

갈 수만 있다면 큰길로 가길 원한다. 시골 길이 도시처럼 넓은 곳이 얼마나 된다고 내 생각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몇 번이나 돌면서 망설이다가 농로로 들었다. 우회전하려고 핸들을 돌리는데 돌아가질 않는다. 비는 쏟아지고 내 차는 논 가운데 서 있다. 이리저리 둘러봐도 초록빛 바다다. 계기판에 붉은 기호가 뜬다. 이십 년 이상을 운전했어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옆을 보는 순간 오른쪽에 몇백 년은 됨직한 느티나무가 서 있다. 꼼짝 못 하고 어이없이 차 안에 갇혀있어야 하나. 두려움이 엄습한다.

나는 자인면 일언리 마실에 있는 전설을 따라가고 있는 중이다. 혹시 내가 찾으려고 하는 일언리 마실 상엿집이 있던 자리가 여기였었던가. 아니면 알 수 없는 힘이 내 길을 막는 것인가. 머리가 쭈뼛하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자인면 일언리에는 상엿집이 없었다. 사람이 죽으면 이웃 마실에 가서 상여를 빌려 쓰곤 했다. 의논 끝에 이 마실 사람들도 마을 입구에 있는 도랑 옆에다 상엿집을 지었다. 상엿집을 짓고 난 뒤부터는 어찌 된 일인지 나이 많은 사람도 아닌 청년들이 하나씩 죽어 나갔다. 마실에서는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알 방법이 없었다. 그러던 중 어떤 영감님이 이 앞을 지나가면서 “상엿집이 마실 앞에 있는데 사람이 죽으면 빨리빨리 내보내려고 입구에 있는 것 같으니 틀림없이 사람들이 많이 죽겠구나.”라고 했다. 그제야 사람들은 서둘러 상엿집을 마실 뒤에 있는 공동묘지로 옮겼다. 그 후로는 청년들이 더는 죽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영웅 신화를 읽어 보면 모험을 떠나는 기사들은 길을 벗어나 숲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모험하기 위해선 그러해야 하리라. 필자는 담이 큰 남자도 아니고 모험심이 강한 여걸도 아니다. 더구나 금기를 위반한 신성한 지역을 들어선 것도 아니었다. 진정되지 않는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난 나쁜 짓을 하려고 가는 것도 아니고 전설 속에서 잠자고 있는 일언리의 마실을 보려고 가는 것뿐이니 내 마음을 읽는다면 길을 열어 주세요.` 다시 핸들을 돌리려고 힘을 줬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 핸들이 스르륵 풀린다.

머리가 멍해지고 눈앞이 노래서 어떻게 논길을 헤쳐 나왔는지 모르겠다. 미스터리한 일이었다. 길을 찾아 헤매는 동안에도 찰나에 일어났던 일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다시 한 번 그 장소에서 재현해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무섭기도 하고 어떤 힘이 노할 것 같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미스터리에 빠진 후로는 공황상태였다. 며칠 동안 고민하다가 차가 문제인가 싶어서 카센터에 갔다. 이러저러한 현상이 생겼었는데 뭐가 잘못됐는지 봐달라고 했다. 기사는 내 차를 가지고 이십여 분 주행해봤지만 아무런 문제도 발견하지 못했다며 그런 일이 생기면 다시 오라고 했다.

인터넷에서 연지의 위치를 검색했다. 비가 그치고 해가 반짝 났다. 즐거운 기분으로 운전대를 잡았다. 자인 방향으로 드는데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졌다. 또다시 포기한다면 일언리의 전설은 내 기억 속에서 영원히 잠자고 말 것이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왔던 길을 몇 번이나 반복하고서야 검색할 때 봤던 `한민절곡`이 보인다. 나비부인을 보니 한민절곡 옆에 연못 표시가 있다.

한참을 걷다 보니 공장 뒤편에 길이 나온다. 버스종점인지 넓은 주차장 아래로 연못이 있다. 순간 아찔했다. 깊은 연못은 아닌데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현기증이 난다. 마치 절벽에서 내려다보는 느낌이다. 다른 저수지에는 우중에도 강태공들이 득실거리는데 이 연못은 적요하다.

예전에 참으로 못된 시어머니가 있었다. 찌꺼기 밥이 남으면 며느리한테 한 숟갈 주고, 없으면 주지 않아 며느리는 굶기를 예사로 했다. 착한 며느리는 수년을 참고 살았다. 배고픔을 참지 못해 무엇이라도 먹으려고 하면 시어머니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감시를 했다. 며느리는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시집올 때처럼 연지를 찍고 곱게 단장한 후, 이곳에 몸을 던졌다. 그 이후로 이곳을 연지못이라고 불렀다.

▲ 대구 행복의 전화 소장
▲ 대구 행복의 전화 소장
고부간의 갈등은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일는지도 모른다. 나도 어느 집안의 며느리이고 앞으로 며느리를 맞이할 아들을 둔 사람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서로가 행복한 길일까. 나도 시집살이를 겪은 터라 이 못에 몸을 던진 며느리의 아픔에 공감이 간다. 연지는 며느리의 한이 서린 듯 물안개로 뿌옇다. `오죽`이라는 말밖엔 떠오르지 않는다.

경산시 자인면 일언리는 전설이 많은 곳이다. 전설은 전설일 뿐 상여집이 있던 곳도 정확히 어디쯤인지 알 수 없고 옛 모습은 찾기가 힘들다. 마실 주변엔 공장이 많이 들어서 있다.

흔적은 가슴에서 산다. 살아온 뒷면마저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지나친 욕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