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재현 편집부국장

날씨는 그 어느 해 보다 식었지만 신드롬 두 개가 달궜던 8월이 가고 있다. 얼마 있으면 서둘러 닥칠 추석 아침에 올해는 어떤 가을의 성찰을 해야 할까. 이 편한 세상에 제수 용품 걱정이 없으니 가을걷이가 아니라 `한해걷이`가 바빠지는 걸까.

좁은 좌석에 끼어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덧 프랑크푸르트 공항 도착이 멀지 않다. 기금의 지원을 받아 양극화 문제 해소와 실업극복 사례를 찾기 위한 간만의 해외 취재길이다. 긴 시간을 교황과 이순신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검색을 하면 두 사람이 마치 신조어 인듯 합쳐져 `신드롬`이란 단어와 함께 온라인을 누볐었지.

`영웅의 부재가 빚은 현실`이라는 파악이 대체적이었다. 맞다. 내치(內治)는 공직에 대한 잇단 호통이 상징하는 여성 지도자의 비장함으로, 외치(外治)는 북한과 일본에 대한 원칙을 내세운 전략이 지지도를 키워간 대통령이었다. 그날 사고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국민의 마음을 마치 무정부상태와 같은 광야로 내몬 진도 앞바다를 보기 전까지는. 50여년전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김주열의 시신이 자유당 정권의 부패를 둥둥 띄워 보여줬다면, 세월호의 허연 배 밑창은 성수대교와 삼풍의 `빨리빨리 병`에서 더 퇴행한 `관피아 암`을 드러냈다.

하지만 `사고 전과 후가 다른 나라가 될 것`이라던 절박한 성찰은 또다시 냄비근성의 한 근거가 될 공산이 커간다. 뒤이은 두 영웅의 신드롬이 전철을 걷고 있듯이. 역사에서 배우진 못한 옆 나라 백성을 탓하기 전에 목전에서 피와 땀이 철철 떨어지는 `역사의 초침`(秒針)인 사초(史草)들에 전율하고도 또 비극과 성찰의 교훈을 잊어갈 건가.

노구의 교황은 현장을 중요시했다. 왕의 처소와 같은 청와대에서 무뚝뚝했던 행복바이러스는 지역에서 청년과, 장애인과, 아이들과 만날 때 비로소 다시 피어났다. 앞선 교황을 맞기 위해 대구대교구가 쓴 애를 이번에는 대전에서 기꺼이 받았다. 소외되고 상실한 이들에 대한 관심과 이를 위한 현실적 변화 노력을 촉구한 외침은 지역에도 위안이 된다. 소외와 상실은 지역이 처한 불균형의 딜레마와도 겹치니까. 특히 어찌 보면 지역은 중앙과 수도권 패권주의가 군림하는 `서울민국`에서 교황이 살갑게 보듬는 시장 실패 영역의 행정 단위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역의 성찰과 결의는 마치 동병상련과 같은 시·군의 연대감처럼 공유·지속돼야 한다. 중앙에서 뿌리 내린 관피아의 폐해가 멀리 호남 변방 진도에서 격발되고 주민들의 생업 고통에 이어지는 현실을 기억해야 한다. 중앙의 권부에서 은밀하게 잉태된 부정들은 대부분 변방에서 본색을 드러내어 민초의 고통으로 번져갔다.

이 땅의 이름 없는 산천에 걸쳐진 변경(邊境)이 그랬고 그에 붙박혀 살던 의병들이 그랬다.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즉 `호남이 없었다면 나라도 없었을 것이다`는 충무공의 기록을 지역주의의 잣대로 판단할 일도 아니다. 지리적 요충이든, 호남인의 노고 때문이든 왕이 도망간 조선 팔도의 변방들은 모두 국난 극복의 중심 현장이었다. 경상에 곽재우가 있었듯 관북에 정문부가 있었으며 그 주력은 의병이었다. 지방에 부임한 여느 방백, 여느 장수가 마치 출세를 보장할 운세의 고향이 서울인 듯 복귀에 수구초심, 실의에 빠져 공사를 저버리던 세태에 그는 지역과 밀착해 위기에 대응했다.

복잡했던 생각들이 정리되는 즈음, 비행기는 드디어 서유럽 선진국의 땅을 쳤다. 주로 독일과 영국, 앞선 협동조합의 성공 사례가 취재 대상이다. 사회적 경제의 상징으로 박근혜 정부의 관료들이 앞서서 권장하고 있지만 오해가 많은 기업 형태. 시장 실패 영역의 자구책이자 대안이라는데 편견은 많다. `좌파다, 아마추어 경영이다, 대충하다 접는다`, `교황=공산주의자`이라는 실패한 편견이 양극화에 절박한 우리 사회에서도 그 전철을 밟기를 바란다.

그 사이, 컨베이어가 쏟아낸 수하물 속에 내 트렁트가 보인다. 그런데 손잡이 표식이 노란 리본이다. “혹시 내가 좌파로 보이진 않을까”. 유럽까지 따라온 천덕꾸러기 악령에 웃음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