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현의 역사인물탐구 (1) 하 륜

▲ 오방재는 하륜과 아버지 하윤린, 조부 하시원을 모신 재실이다.

8·15 해방 이후 국내 정치가 안정적이었던 때는 별로 없다. 특히 해방 후 유입된 좌익세력이 국내 정치에 일정부분을 차지하면서 진보층으로 고착화됐고, 이후의 기성 정치권 또한 영·호남을 기반으로 보수세력화되는 등 이분구조로 뿌리를 내려버렸다.

현재의 정치도 그저 혼란스럽기만 하다. 국가나 국민을 위한다고 밝히고는 있으나 늘 양측이 대립각을 세우면서 기득권 유지에만 급급한 실정이다.

통일신라 이후 고려, 조선까지 당시 시대 정치 상황도 현재와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권력 수성이냐`, `쟁탈이냐`라는 두 가지 핵심 문제도 여전히 치열한 진행형이다. 국내 정치 상황이 안정돼야 한다는 국민적 기대 속에 옛 사람들의 정치형태를 6회에 걸쳐 재조명해 본다.

고려말 좌천·유배 굴곡 딛고 복권 `오뚝이 인생`
조선 건국 반대하다 방원 만나 새로운 정치역정
태종 절대적 신임으로 무한신뢰의 군신관계 유지

이방원(태종)을 왕좌에 오르게 한 킹 메이커는 하륜(河崙·1347-1416)이다. 다시 말해 쿠데타의 주역이었다. 태조 이성계에게 `정도전`이 있었다면, 방원에게는 `하륜`이 있었던 것이다. 하륜은 방원을 보고 조선의 미래를 짊어질 왕이 될 것으로 판단하고 주군으로 모셨다. 방원의 정치적 동지이자 책사가 된 하륜은 결코 군주를 넘어서지 않고 철저하게 뒤에서 보필하는 음지의 `실세`였다. 특히, 그는 이씨 왕조가 500년 지속되도록 하는데 밑그림을 그리는 등 조선왕조 초기 대표적인 인물이다. 하륜은 고려와 조선을 넘나든 난세의 뛰어난 지략가이자 사상가, 그리고 권력의 핵심이었다.

하륜은 고려 말 충목왕 3년(1347)에 태어났다. 18살에 문과에 급제하면서 공직에 입문했다. 그러나 고려가 패망할 때 까지 그의 행적은 순탄하지 않았다. 감찰규정(監察糾正)으로 있을 때 신돈의 비행을 공박하다 좌천되기도 했고,최영의 요동 정벌을 반대하다 유배당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또 복권돼 중책을 맡는 등 `오뚝이` 인생을 살았다. 더욱이 그는 이색, 정몽주 등 고려 왕조`존속파`와 정치적 입장을 같이하면서 조선 왕조 건국에 반대하기도 했었다.

 

▲ 하륜의 묘는 특이하게 팔각이다. 면마다 한 개의 판재를 두르고 사이에 기둥돌을 세운 형태이다. 무덤 앞에는 장명등이 1개 서 있고 좌우에 문인석상 한쌍이 초라하게 서 있다. 봉분 주위는 돌로 쌓은 담이 둘러싸고 있다.그 아래 부인 이씨의 묘가 있다.<br /><br />
▲ 하륜의 묘는 특이하게 팔각이다. 면마다 한 개의 판재를 두르고 사이에 기둥돌을 세운 형태이다. 무덤 앞에는 장명등이 1개 서 있고 좌우에 문인석상 한쌍이 초라하게 서 있다. 봉분 주위는 돌로 쌓은 담이 둘러싸고 있다.그 아래 부인 이씨의 묘가 있다.

그의 정치적 격변은 역동기 속에 방원을 만나 정치적 코드를 맞추면서 가는 길이 달라진다. 특히 그는 왕권강화의 주창자가 됐다. 당시 조선이 개국했지만 정세는 불안했다. 이유는 왕권을 둘러싼 정쟁이 끊이지 않아서였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에서 그는 당시 실세 정도전 세력을 제거하고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으로 진산군(晉山君)에 봉해진다. 이어 방원(태종)이 즉위하자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에 책록된다. 정국을 주도한 건 이때부터다. 당시 조선은 개국을 했음에도 중국 명(明)나라로부터 국가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하륜은 1402년(태종 2년) 좌정승이 되어, 명나라 영락제(永帝)의 등극을 축하하는 등극사(登極使)로서 명나라에 간다. 그는 그곳에서 `새 천자가 이미 천하와 더불어 다시 시작하였으니, 청컨대 우리 왕의 작명을 고쳐 주소서`라며 명을 설득, 조선왕조를 승인하는 고명인장(誥命印章)을 받아 왔다

1416년 70세로 치사(致仕·나이 70세이면 관직을 왕에게 되돌리고 나이 들었음을 고하는 뜻으로 정년 퇴직 )한 그는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에 봉해졌는데 왕명으로 함길도 선왕의 능침(寢)을 순심(巡審)하고 돌아오는 도중에 죽었다. 시문에 능하고 음양·의술·성경(星經)·지리 등에 조예가 깊었던 그는 문한(文翰)을 주관하여 `동국사략` `태조실록`의 편수에도 참여했다. 신왕조 초기의 한양천도, 문물제도의 정비에 크게 기여했으며 외교정책에 능해 조선 초기 명나라와의 외교문제를 해결했다. 그에 대한 태종의 신임은 절대적이었다. 그가 권력 실세로 장수할 수 있었던 것은 사전에 주군의 의중을 확인한 뒤에 그에 맞는 국가정책을 수립했기에 가능했다. 또, 그는 자신의 의견이 주군의 의견과 충돌할 경우에는 주군의 생각을 바꾸기보다는 자기의 생각을 바꾸는 스타일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군신(君臣)간에 피어난 무한한 신뢰와 애정은 이 두사람보다 더한 관계는 없을 것이다.

이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태종 16년(1416년) 10월23일 하륜이 자신의 병세를 알리는 상서(上書)를 임금에게 보냈다. `하륜이 후하게 성은을 입어 길에서 병은 없었으나,이 달 12일에 예원군에 이르러 비로소 턱 위 오른쪽에 종기가 나는 것을 알았습니다. 13일 정평부에 이르러 정릉, 화릉을 알현하고 이틀 머물러서, 또 질침 100여 매를 쓰고 19일 도로 정평에 이르러 삼가 상은(上恩)을 입어 특별히 내신(內臣)을 보내어 내온을 주시니, 신이 병중에 지수(紙受)하고 감격하였습니다. 22일에 또 내의를 보내어 병을 묻고 구료하셨습니다. 신이 쇠하고 늙은 가운데에 다행히 사명을 받았으나 병 없이 빨리 돌아가서 성려(聖慮)를 번거롭게 하지 않기를 바랐는데, 지금 종기의 형세가 점점 넓어지고 아파서 베게에 엎드려 신음하는데 내의(內醫)가 봉교(奉敎)하고 와서 치료하여 주니, 신이 감격하여 목이 메어 말을 다하지 못하겠습니다`

아픈 하륜에게 태종이 `주치의`를 보내자 감읍해서 쓴 친전(親展)인데, 70이 된 신하가 19살이나 적은 왕에게 보낸 병세보고서여서 읽는 이로 하여금 심금을 울릴 정도로 세세하다. 또, 왕의 권위와 신하의 도리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지금 상황을 비교하면 퇴직한 정부 관료가 병환이 있자 대통령이 주치의를 보내 치료케 한 것 과 같다. 하륜의 병세가 심각하자 태종은 또 내의 이헌과 양홍달를 보내 치료케 했다. 이헌이 태종에게 고하길 “하륜의 병이 급합니다”하니 태종은 반감(飯監)을 시켜 내선(內饍)을 가지고 정평에 가게하고 명령하였다. “조석 반찬은 내가 먹는 것과 똑같이 하라”

 

▲ 하륜이 치사(致仕) 환향하게 되자  태종이 내린 친필 벽오당(碧梧堂)과 교지.<br /><br />
▲ 하륜이 치사(致仕) 환향하게 되자 태종이 내린 친필 벽오당(碧梧堂)과 교지.

하륜졸기(河崙 卒記)를 보면 두 사람과의 관계는 더 끈끈하다. 하륜이 정평에서 졸(卒)하자 태종은 3일 동안 조회를 폐하고 7일 동안 소선(素膳·생선이나 육류가 없는 간소한 반찬)하면서, 쌀과 콩을 각각 50석과 종이 200권을 치부하고 예조좌랑 정인지를 보내어 사제하였는데 그 글은 이러하다.

`원로 대신은 인군의 고굉(股肱·팔과 다리)이요, 나라의 주석(柱石)이다. 살아서는 휴척(休戚·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고 죽으면 은수(恩數)를 지극히 하는 것은 고금의 바뀌지 않는 전례이다. 생각하면 경(卿)은 천지가 정기를 뭉치고 산악이 영(靈)을 내리받아 고명정대한 학문으로 발하여 화국(華國)의 웅문(雄文·깊은 생각과 힘찬 기상이 세련된 문장으로 표현된 글이나 글씨)이 되었고,충신 중후한 자질로 경세(經世·세상을 다스림)의 큰 모유(謨猷·어떠한 일을 이루기 위해 세우는 원대하고 담대한 꾀)가 되었다....(중략)…. 경의 몸은 비록 쇠하였으나 왕실에 대한 마음을 다하여 먼길의 근로하는 것을 꺼리 않고 스스로 행하고자 하였다. 나도 또한 능침이 중하기 때문에 경이 한 번 가는 것을 번거롭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외에 나가서 전송한 것이 평생의 영결(永訣)이 될 줄을 어찌 뜻하였는가? 아 슬프다. 사생의 변은 인도에 떳떳한 것이다. 경이 그 이치를 잘 아니 또 무엇을 한하겠는가. 다만 철인(哲人)의 죽음은 나라의 불행이다. 이제부터 이후로 대사(大事)에 임하고 대의를 결단하여 성색(聲色·말소리와 얼굴 빛깔)을 움직이지 않고, 국가를 반석의 편안한 데에 둘 사람을 누구를 바라겠는가 .이것은 내가 몹시 애석하여 마지 않는 것이다. 특별히 예관을 보내어 영구(靈柩) 앞에 치제(致祭)하니, 영혼이 있으면 이 휼전(恤典)을 흠향하라`

하륜 사후에도 태종은 끊임없는 아량을 베풀었다. 그가 죽자 부인 이씨가 애통하여 음식을 전혀 먹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은 태종은 “상제(喪制)는 마치지 않을 수 없으니, 비록 죽는 것을 돌아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제를 마치지 못하는 것을 어찌하겠는가.부디 술을 마시고 슬픔을 절도있게 하여 상제를 마치라”며 약주를 하사했다. 조선초기 왕이나 재상중 어진이나 초상화가 없는 이는 태종과 하륜이다. 하륜의 묘는 경남 진주시 미천면 오방리 산 기슭에 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윤종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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