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재현 편집부국장

대한민국에서 고등학생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적 만을 강요하는 일등주의, 친구 사이라도 지면 안 된다는 경쟁주의는 피가 쩔쩔 끓는 그들을 밀실로 내몬다. 창문 하나 밖의 세상이 꽃 피는 봄날인데도 이른바 신경 꺼야 하는 교실도 밀실이요, 파김치가 돼 돌아와 또다시 책을 펴야 하는 내 방도 밀실이다. 아예 공부와 담 쌓았다면 대부분이 거쳐가는 코스인 PC방은 또 어떤가?

그저께 진도 참사에서 희생된 고교생들의 영전에는 어떤 조사를 올려야 할까? 천안함 사건 당시처럼 제발 살아서 돌아오라고 하는 건 이젠 진부하기 까지 하다. 지금쯤 차가운 어느 선실에선가 얼마 전 까지 싱싱하던 제 육신을 바라보고 있을 어린 영혼이 있다면 과연 이 바람이 얼마나 위로가 될 수 있을까?

할아버지뻘인 선장이 초반에 도망가고도 선실에 가만히 있으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고 한다. 이를 따른 아이들은 비교적 `범생이`들이었을 거다. 용케 미리 몸을 움직여 빠져 나온 아이들은 위기 상황에 대한 동물적 감각이 작동했거나, 어른들의 말을 뒤집어 생각할 수 있는 꾀도 있었을 거다. 어른들이 안전을 책임지지 않는 나라에서 우리의 아이들은 알아서 살길을 찾아야 한다.

대중교육의 틀에 짜여진 한국의 학교에서 공부의 의무만 강요당하며 마치 사육되듯 커가는 우리 고등학생에게 과연 무엇을 더 가르쳐야 하는가? 영어단어만 강요할 게 아니라 안전행정부가 교육부와 부처의 벽을 허물고 위험 상황에 대한 대처 요령을 이제부터라도 가르쳐야 한다. 그것이 살아 있는 공부다. 학교 밖을 나서서 자연과 만나면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세상을 그대로 이해하게 해야 한다. 그들이 대피를 제대로 못해서 참사가 났다는 말은 아니다. 국가의 규제와 관리를 벗어난 여객선의 폐쇄공간 속에서 수백의 꽃다운 목숨을 방치하는 나라에서 공부만 하라는 사회적 강요 또한 참사와 다름 없다는 답답함에서 주장하는 것이다.

경남 진주의 외국어고 학생 2명 폭행치사 사건도 마찬가지다.

교육감의 부인이 이사장인 이 학교 학생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외국어고교생과는 좀 다르다고 한다. 소위 `1진` `2진`들이 많이 진학하는 학교라면 기숙사 관리는 철저했어야 한다. 지난해 교외 성폭력 1건 등 모두 4건의 학교폭력사건이 있었는데도 `학교폭력예방 우수사례공모전`에서 교육부장관상을 받았다고 한다. 이쯤 되면 `어글리 코리아`라고 해도 고개를 못 들 수밖에 없다. 이사장은 11일만에 두 번째 희생자가 나왔는데도 다음날 창원의 보육단체 행사에 참석해 남편의 선거운동을 도왔다고 한다.

정해진 수순처럼 교육청과 경찰 등이 모듬으로 학교폭력 대책을 점검한다고 부산을 떨고 있다. 하지만 이미 우리 학교와 교육청의 학폭 대책은 진정성을 잃은 지 오래 됐다. 겨우 초등학교 3학년생들의 교실에서 `짝을 샤프로 건드렸다` `친구에게 달고나를 사주고 집에 가서는 돈을 빼앗겼다고 거짓말을 했다`는 시비가 나와도 학교폭력위원회를 연다. 학생마다 가해와 피해의 혐의가 뒤섞여 있더라도 마치 선착순처럼 먼저 신고를 하는 쪽이 완벽한 피해자가 되는 것이 우리 학교의 현실이다. 수업까지 맡아야 하는 상담교사에게 관련 학생 조사는 성가신 요식행위에 불과하다. 따돌림을 당하고 호소해도 `당할 짓을 했겠지`라는 조롱이 앞선다.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은 수학여행길에 나섰다가 선장은 먼저 도망가고 배는 침몰해 실종된다. 교육감의 부인이 이사장인 변종 외국어고에서 열하루 사이에 친구 두명이 맞아 죽는다. 정부가 나서서 우리 아이들 참사의 근본문제부터 점검하지 않은 상황은 국가의 폭력이나 다름 없다. 어린 희생들 앞에 비통해 하고, 어른들의 부조리에 분노한다면 지금 당장 자리를 털고 일어나 개선을 촉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