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대환 작가·계간 `ASIA` 발행인

설밑에 다보스 포럼이 열렸다. `1% 세계인 2천500명`이 모였다. 박근혜 대통령, 아베 총리가 연설을 했다. 누가 더 잘했을까 따위는 부질없는 궁금증이다. 자국(自國)의 경제정책 홍보에 열중했던 것이다. 자본주의의 원초적 문제를 그 화려한 무대에 올려놓은 이는 프란치스코 교황이었다.

“인간은 부를 창조해야 하지만 부에 의해 지배돼서는 안 된다. 부의 불평등으로 인해 고통받는 가난한 사람들을 구해내야 한다. 평등에 대한 요구는 경제성장보다 더 중요하며, 인류 최상의 비전이다. 더 평등한 분배, 더 나은 고용과 복지를 위한 결의, 체제와 과정이 필요하다”

자본주의, 어디서 왔는가? 교황의 메시지에 답이 있다. `부(富)의 창조`에서 왔다. 인간사회에서 부를 창조하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과 제도가 시장(市場)이다. 그래서 인류는 시장경제를 끝없이 키우고 있다. 자유무역협정도 시장경제를 더 키워가는 글로벌 자본주의체제의 수단이자 제도일 따름이다.

자본주의, 어디로 가는가? 교황의 메시지에 답이 있다. 인간이 부에 의해 지배되지 않으면서 `인류 최상의 비전`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여기서 질문은 `자본주의, 어디로 가야 하는가?`라고 수정되어 마땅하다. 어떤 강제력이 자본주의의 운전대를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목적지는 `체제`다. `결의`만으로는 미흡하니까 `체제`를 갖춰야 한다. `인류 최상의 비전`이 `체제`와 직결된 것이 아니라면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바이블`다음으로 많이 읽히는 진기록은 세워질 수 없었을 것이다.

한국의 설 연휴 동안, 오바마 대통령이 국정연설을 했다. “최상층에 있는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잘살고 있지만 미국 근로자의 평균임금은 거의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불평등의 골은 깊어지고 상황 이동은 멈춰 섰다” 상황 이동이란 한국에서 말하는 신분 상승, 계층 이동이다. 그래서 오바마는 남은 임기 중에 `기회의 사다리`를 재건할 것이며, 의회가 협조하지 않으면 대통령의 행정명령을 발동하겠다고 했다. 교황이 다보스에 보낸 메시지가 희미한 메아리로 워싱턴에 깃든 것 같았다.

오바마는 교황의 `체제`야 꿈도 못 꾸지만 작은 `결의`라도 행동할 태세다. 그럴 수밖에 없어 보인다. 2009년~2010년 미국이 2.3%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는데, 그때 99%의 미국인은 소득이 0.2%만 증가한 반면에 최상위 1%는 소득이 11.6%나 증가했다. 이것은 `20 대 80`이 아니라 `1 대 99`의 체제로 굳어지고 있다는 숨기지 못할 증거다.

슈퍼리치(Super Rich, 대갑부)가 지배하는 체제로서의 자본주의, 이것이 불평등의 실상이며 자본주의 위기론의 실체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다보스 메시지가 21세기 인류의 양심에 깊은 공명(共鳴)을 일으킨다.

자본주의, 어디로 가야 하는가? 기회균등은 기본조건에 불과하다. 세습과 경쟁의 결과물인 불평등을 최소화할 `체제`에 도달하기 위해 공동체적인 결의와 행동을 해야 한다. 그 과정에는 애덤 스미스와 카를 마르크스가 종종 참고인으로 불려나올 테지만, 만약 현재의 불평등체제가 악화되어 99% 대다수가 `자본주의는 진화해왔듯이 앞으로도 진화할 것`이라는 믿음을 팽개치는 경우에는 영원히 역사관에 박제돼야 할 `피의 혁명`이 다시 심장을 장착할 수도 있다. 이것은 `똑똑한` 슈퍼리치들이 잘 아는 역사의 원리다. 사회적 존재, 정치적 존재로서는 스티브 잡스보다 훨씬 더 똑똑해 보이는 빌 게이츠의 `친절한 자본주의`도 저주 받은 `피의 혁명`을 미리미리 예방하자는 전략적 사고를 담았을 것이다.

슈퍼리치들이 잘 모르는 것은 `인생은 나그네 길`이라는 소박한 허무주의고, 그들에게 너무 부족한 것은 `인간은 지구의 하숙생에 불과하다`라는 소박한 허무주의적 감성이다. 인간은 윤리적 이성의 힘으로 엔간히 욕망을 다스리긴 하지만,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 이 소박한 허무주의가 사실은 욕망을 길들이는 윤리의식의 뿌리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