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볕아래, 칼날같은 겨울바람속 혹독한 근무
역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한다는 맘으로 견뎌

독도경비대가 언론에 자주 거론되는 것이 마냥 멋있고 든든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막상 독도경비대에서 생활해보니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듯 혹독한 고통을 견뎌야만 비로소 자부심을 느끼는 독도 경비대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독도 입도 전 거치는 울릉경비대(울릉읍 사동리)에서 50일간의 예비대 훈련은 온몸에 멍과 근육통으로 고통스러웠다. 전역이 한 달도 남지 않은 선임들도 목소리가 쉴 때까지 악을 쓰고 고된 훈련을 받았었다.

특공만술을 익히며 입안에 흙이 씹힐 때까지 흙바닥을 뒹굴고, 전술 훈련을 위해 팔꿈치와 무릎에 생채기를 내며 격하게 서바이벌 훈련을 하고, 다리까지 후들거리는 극한의 공포를 느끼며 레펠 훈련까지 수료해야 입도 할 수 있다.

처음 독도에 갔었던 여름에는 찌는 듯한 더위를 이기며 333개나 되는 계단을 오르내리느라 비지땀을 쏟아내야 했었고, 무수한 갈매기 사이로 독도 인근에 수상한 선박이 없나 땡볕에 서서 감시해야 했다.

두 번째 들어간 이번 겨울에는 관측 근무 중 칼날 같은 겨울바람에 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끼며 추위를 참았다. 한바탕 바람과 싸우고 나면 피곤한 몸을 이끌고도 손과 발이 저려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한번은 관측 근무를 서다가 갈매기가 우는소리에서 `형아! 형아야!`하는 어린 동생의 목소리로 착칵하고 한참을 두리번거린 적도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바라보며 저 멀리 어딘가에 있을 고향을 생각하면 두고 온 가족들 생각에 이름조차 외로운 독도에서 남몰래 눈시울을 붉힌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이토록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견뎌내면서도 독도 경비대에 자원, 군 복무를 하는 것을 단 한 번 도 후회해 본 적 없다. 왜냐하면, 내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훗날 독도가 한국 땅 이라는 증거로 독도에 상주했던 경찰 중 한 명으로 나의 이름이 적혀 있는 걸 생각하면 가슴이 뿌듯하다. 독도 접안지에 오는 관광객들의 따뜻한 말 한마디 또한 든든한 버팀목이 돼준다.

`우리 아들, 지켜줘서 고맙다.`, `우리 손자, 고생이 많지?` 이런 말 한마디에 쌓여왔던 피곤도 사라진다. `국민 여러분! 어떤 위협과 고난이 있더라도 우리 땅 독도를 수호하겠습니다. 독도 경비대의 독도수호에 대한 의지는, 바람이 불면 불수록 더 활활 타오르는 성화(聖火) 입니다` 충성!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