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의 땅 대구·경북 (3) 영덕전투

▲ 영덕 장사 상륙작전 기념 위령탑에서  위령제를 지내는 모습.
▲ 영덕 장사 상륙작전 기념 위령탑에서 위령제를 지내는 모습.

무방비 상태의 3·8선을 돌파한 북한군이 영덕지역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50년 7월초. 동해안을 따라 파죽지세로 남진하던 북한군 제5사단이 울진 부근에서 국군에 의해 그 기세가 저지되면서 잠시 멈추게 된다. 6월 29일 국군 제3사단 23연대는 울진에 도착한 후 북한군과 접전을 벌이면서 15일 정도 적의 진공을 지연시킨 후 평해를 거쳐 7월12일 영덕으로 철수, 영덕 부근에 연대 전투지휘소를 설치하고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고자 했다. 7월14일에는 먼저 설치돼 있던 제3사단 지휘소를 포항으로 옮긴 후 미8군 해·공군의 지원을 받아 영덕지구를 고수하기로 결정하고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북한군 제5군단장은 국군의 저항에 부딪혀 진격이 늦은 제5사단 지휘부를 질책하는 한편, 북한군 제12사단으로 하여금 안동을 거쳐 포항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하달하고는 전투를 독려했다.

영덕지역에서 아군과 대치하고 있던 북한군 제5사단은 상부의 질책과 제12사단의 안동을 우회한 포항 점령의 작전을 성사시키기 위해 7월17일 여명을 기해 영덕 북방 화수동에서 북한군을 저지하고 있던 국군 제23연대를 집중 공격해 왔다.

적의 맹렬한 공격에 제23연대는 영덕을 적의 수중에 넘기고 영덕 남쪽으로 후퇴했다. 그러나 영덕이 안동과 영양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일 뿐만 아니라 포항방어를 위한 최일선의 전초기지로써 그 중요성이 높아 국군과 미8군은 영덕을 재탈환하기로 결정했다. 제3사단은 미8군으로부터 105㎜ 곡사포 부대를 지원 받은 후, 7월18일 새벽 제23연대와 독립대대가 영덕탈환 작전을 펼쳐 영덕을 다시 탈환했다. 이 전투에서 적은 막대한 피해를 입은 후 화림산 쪽으로 패주했다. 그러나 이튿날인 7월 19일 전열을 정비한 북한군은 다시 영덕을 공격해 강구까지 진출 강구와 영덕의 중간에 위치한 181고지, 즉 금호리 뒷산 일대를 중심으로 밀고 밀리는 공방을 계속했다. 이러한 181고지를 선점하기 위한 공방은 이후 7월 29일까지 계속됐으며, 7월 29일 아군은 영덕을 세번째 탈환하고 영덕 북쪽 2㎞선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1950년 7월 북한군 영덕 일대 아군 후방지역 교란 극심
장사상륙작전은 인천상륙작전 성공보장 위한 양동작전
전투 경험 없는 어린 학도병 수백명 고귀한 희생 치러

□ 지품 삼화동 전투

개전초에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북한군 제5사단 이외에도 북한 제766유격부대가 이미 영덕지역으로 침투해 영덕에서 안강지구에 이르는 아군의 후방지역을 교란하고 있었다.

따라서 7월12일 울진에서 영덕으로 후퇴한 제3사단 23연대장은 적 정규군의 공격이 있기전에 후방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7월15일 아침 35명의 고참 중대원을 선발, 화림산 좌단으로부터 34번도로 북방일대에서 주간에는 수색정찰, 야간에는 매복으로 적 유격대의 영덕침입을 저지하고 이를 토벌하도록 명령했다.

대원들은 첫날 주간에 삼화리 일대를 수색한 후 야간에는 오천리 마을 뒤의 오솔길 양측에 매복을 하면서 중기관총 1정을 우측대열 중간에 배치했다. 밤이 깊어지자 소대 규모의 적들이 오솔길을 따라 접근해 왔다.

대원들은 적들이 오솔길 가운데 들어설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 일제히 기습사격을 가해 완전히 섬멸한 후 적 증원부대의 공격에 대비 약 4㎞ 동쪽의 화림산 좌단에 새로 매복을 했다. 대장인 박관영 상사는 35명의 대원을 3개조로 나눠 `ㄷ`자형으로 배치하고 좌측에 중기관총을, 정면에는 2.36인치 로켓포를 배치하고 사격개시 신호는 로켓포의 초탄발사로 했다. 모든 준비를 마친 아군의 대유격 특공대원들은 적의 증원부대가 다가오도록 조용히 기다렸다.

이윽고 먼동이 터 오를 무렵 풀이 우거진 전방에서 인기척과 함께 적 유격대원들의 조심스런 접근이 포착됐다. 대원들은 초긴장 속에 적 유격대가 `ㄷ`자형의 정면으로 들어 올 때까지 쥐죽은 듯이 기다렸다.

마침내 적들이 올가미 가운데로 들어오자 박관영 상사의 로켓포가 섬광을 일으킴과 동시에 전 화기가 적들을 향해 불을 뿜었으며, 일부 도주하는 적들은 아군과의 백병전에 의해 모두 섬멸됐다.

▲ 장사상륙작전 전투상황도<br /><br />1950년 9월14~19일
▲ 장사상륙작전 전투상황도 1950년 9월14~19일

□ 축산 도곡지구 적 전차 습격전

1950년 7월 하순께는 북한군 제5사단은 영덕선까지 진출 아군 제3사단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공방전을 치르고 있었다. 이때 3사단 지휘부는 서울지역 전투에 투입되었던 22연대를 사단에 복귀시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181고지를 점령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22연대가 마침내 181고지 일대를 점령해 영덕지구 방어를 위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적 전차로 인한 피해가 엄청났다. 따라서 22연대장은 적 전차를 없애지 않고는 아군의 작전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고 판단, 이들 전차의 파괴를 위한 특공대를 조직했다.

이들은 침투 도중 전방 약 3㎞ 지점에서 적 1개 소대 규모가 휴식을 취하는 것을 보고 3면에서 포위 공격 4명을 제외한 전원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생포된 4명 중 3명은 이 지역에서 북한군에 강제로 징집된 신병으로 아군에게 적극적으로 협력을 하겠다고 해 포로로 잡았다. 이들은 적의 전차대에 소속된 정찰병으로 전차의 움직임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어 특공작전에 많은 도움이 됐다. 특공대원들은 포로를 앞세우고 적 전차 진지까지 무사히 접근했다. 적 전차 진지에는 3대의 전차가 있었다. 대장은 3명의 포로를 1명씩 각조에 배치해 각 조가 1대씩 적 전차를 파괴하도록 지시했다. 각 조의 조장은 포로를 이용, 전차병을 유인해 전차의 해치를 열도록 했으며 적 전차병이 해치를 열면 포탑 옆에 숨어있던 특공대들이 일제히 수류탄을 해치 안으로 집어넣어 적 전차 3대를 모두 파괴시켰다.

임무를 완수한 특공대는 재빨리 철수했다. 그러나 철수도중 상곡재 부근의 138고지 동쪽에서 적의 경계부대에 발각돼 치열한 접전 끝에 후미의 3조는 행방불명이 되고 1·2조만 귀환했다.

□ 장사 상륙작전

잊혀진 전투 장사상륙작전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보장하기 위한 양동작전이었다. 적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인천상륙작전을 하루 앞둔 1950년 9월 14일 전격 이뤄졌으며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한국전쟁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장사상륙작전은 참전병 779명중 600여명이 18세부터 19세까지의 어린 학도병들로 불과 보름 동안의 훈련을 거쳐 해군 수송함인 LST문산호에 몸을 싣고 9월13일 부산항을 출발, 다음날인 14일 새벽 5시께 영덕군 장사해안에 도착했다.

이 날은 태풍 `케지아`의 영향으로 바람이 세차고 파도가 높은 가운데 안개마저 자욱해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장사동의 남쪽 해안으로 접근하던 문산호는 상륙직전 좌초하면서 상륙작전 자체가 자칫 수포로 돌아갈 형편이 됐다.

하지만 미 구축함의 지시에 따라 작전은 감행되었고 장사동에 주둔하고 있던 1개 대대 규모의 적은 문산호를 향해 집중포화를 퍼부었다. 아군은 해안가에 로프를 결박해 헤엄을 쳐가면서 상륙작전을 감행했으나 전투경험이 없는 선발대는 수많은 희생을 당했다.

아군은 계속해서 상륙을 감행 적5사단과 열한 전투를 벌여 적군의 동부지구 후방 보급로를 완전 차단하고, 적의 후방 주력을 동해안으로 유인 집결토록 함으로써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토대를 마련했다.

이 작전으로 110명의 부상자와 129명의 전사자가 발생하고 39명이 구조선에 오르지 못하고 해안에 남는 등 많은 희생이 따랐다.

이때 생존한 학도병들은 `장사상륙작전참전유격동지회`를 결성 매년 영덕군과 더불어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정규군이 아니라는 이유로 국가로부터 예우를 받지못한 서러움과 나라와 민족을 위한 고귀한 희생정신은 올해 착공되는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공원조성사업`의 준공과 더불어 깨끗이 씻겨나갈 거라고 믿고 있다.

▲ 조감도
▲ 조감도

■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공원
상징탑, 추모광장 등 설치
LST문산호도 재현키로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공원은 영덕군 남정면 장사해수욕장 일원 6만8천㎡ 면적에 309억원의 예산을 투입 상징탑, 추모광장등을 공원부지내 설치하고 LST문산호를 재현한다. 전시·교육기능과 5D시물레이션체험관, 세계최초 퇴함(退艦)담력체험장 등을 갖춘 기념관을 바다위에 설치, 단순히 볼거리 위주를 탈피해 전후세대는 물론 전후3세대까지 국난극복의 현장을 직접 체험하고 즐기는 교육의 장으로 만든다는 계획이다.

영덕군민들은 동서고금의 전사를 막론하고 1개대대, 그것도 실전경험이 없고 훈련도 부족한 학도병들이 한국전쟁의 전세를 역전시킨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이끈 결정적 계기를 만든 전투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덕군은 지난 2007년부터 추모음악회, 학술세미나, 국군의날 특집 다큐멘터리 제작 등을 통해 장사상륙작전의 재평가와 기념공원 조성사업의 필요성에 대해 노력해온 결과 2009년 국가보훈처의 협조로 총사업비 240억원을 확보하게 됐다. 이후 실시설계 과정에서 동해안의 특수성을 고려할 때 안정성 문제가 대두돼 사업비가 증액됐다.

군민들은 세계최고의 호국전승공원인 장사상륙작전전승기념공원 조성사업이 완공되면 군사·역사적 재평가와 선열들의 희생정신을 되새기는 교육의 장은 물론 관광객 천만시대를 열어가는 전초기지 역할을 맡아 지역경기 활성화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창훈기자 myway@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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