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기자단의 두바퀴路
⑺ 제철보국의 꿈, 그 역사의 현장 포스코

▲ 모성은 교수를 비롯한 두바퀴路 참여자들이 포스코역사관에서 기념촬영 하고 있다.

“부릉, 부르릉~“ 두바퀴路 전용승합차가 출발한다. 포항 중앙아트홀에서 포스코 역사관으로 향하는 길이다. 모성은 교수가 먼저 마이크를 잡았다. “유럽 11개 선진도시를 무사히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선명하고 기이한 꿈을 꾸었어요. 포스코 역사관을 방문하려고 그랬던지.. 꿈에서 용광로의 불길이 제 연구실 벽을 타고 들어왔습니다….”

“와! 굉장한 꿈인데…. 매우 길한 징조입니다!” 주역에 능한 신일권 박사의 말에 동승자들의 눈이 반짝인다.


1973년 제철소 준공, 조국 근대화 상징 우뚝
포항의 문화·정신 대변… 새 가치 추구할 때

문화와 시민 박계현 이사장이 말을 이었다.

“오늘 방문하는 포스코 역사관도 제철보국의 위대한 꿈과 그 실현과정을 전시한 곳입니다. 포항에는 유형의 문화자산도 많지만 포스코 정신과 같은 무형적 자산도 있습니다. 오늘은 저 용광로 불길같은 무형의 포스코 정신을 학습하고자 합니다”

차창 밖으로 용광로를 지나 그 꿈이 정리된 역사관에 도착했다. 역사관 입구에서 기다리던 도우미가 먼저 롬멜하우스로 안내했다. 롬멜하우스는 포항제철 건설당시 지휘본부인 셈이다. 사막의 영웅 롬멜장군이 모랫바람이 휘날리는 곳에서 전쟁지휘를 했던 것과 비슷하다고 지어진 이름이다.

무형 문화 `포스-피리트`

나영기 전 경실련 공동대표의 강연이 시작됐다. “포스코를 떼놓고 포항을 떠 올릴 수 없습니다” 33년간 포스코에 근무했던 나 대표의 말은 부드럽게 이어졌다.

“포항의 뿌리로 연오랑 세오녀를 뗄 수 없듯이, 포항의 문화형성에 포스코를 뗄 수 없습니다”

그렇다. 우리는 포항의 문화를 생각하며 포스코 정신과 노란제복의 포스코 맨을 잊을 수 없다. 우리는 이를 포스코(posco)와 스피리트(spirit)의 신조어로서 포스-피리트(pos-pirit)라 부르고자 한다.

포스코는 1968년 설립됐다. 그 후 45년 동안 포항을 국내 최고의 산업도시로 올려놓았다. 그리고 자신은 연산 1천750만t 체제를 갖춘 세계 3위의 철강기업으로 우뚝 선 것이다. 특히 한국을 세계 속의 유수한 조강국가로 만들어 놓으면서 한국의 근대화에 크게 기여한 주인공이다.

정부는 1967년 제2차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했다. 일관제철소 계획을 수립하면서 그해 7월 포항을 제철소의 적지로 결정했다. 무거운 원재료를 운반하기 용이한 곳으로 선정한 것이다. 정부가 3억원, 대한중석이 1억원을 출자하여 1968년 4월1일 포항종합제철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제철소 건설을 위해 국제차관단(KISA)이 결성됐다. 하지만 기대했던 차관도입이 갑자기 어려워졌다. 이때 대일 청구권 자금이 남아 있다는 정보를 알고 일본을 압박했다. 그 결과 대일청구권자금 등 외자 370억원과 내자 230억원 등 총 6백여억원을 확보해 1973년 7월 일관제철소를 준공하였다.

故 박태준 회장의 `우향우 정신`

포스코는 한국경제발전의 상징이다. 이 과정에서 고 박태준 회장의 집념이 돋보였다. 이 공장이 실패하면 동해바다로 뛰어든다는 일념으로 공장건설에 박차를 기했다. 포항에서 서울을 향해 섰을 때 동해바다는 오른쪽이었다. 이것이 훗날 박태준 회장의 우향우 정신인 셈이다. 이러한 사생결단의 우향우 정신은 포스코 맨들에게 뿌리 깊게 각인된다. 이것은 포스코를 지탱하는 힘이 되었다. 1978년 포스코는 추석 1주일 전부터 추석휴가반납 캠페인을 벌였다. 추석 당일에는 건설현장에서 함께 합동제례를 지냈다. 추석 휴가까지 반납하며 포스코 3기 공사를 마무리 하게 된다.

인재양성, 미래지향, 복지우선

포스코의 경영철학은 공장건설 과정에서 더 살필 수 있다. 그것은 인재양성, 미래지향, 복지우선이었다.

땅을 다지고 공장을 짓기도 바빴다. 그러나 인재육성이 이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 포스코의 경영철학이었다. 조업기술과 건설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많은 직원을 해외로 연수를 보냈다. 사내 교육기관을 개설해 자체적인 인재육성에도 힘을 썼다.

처음에는 해안선을 따라 일직선으로 공장을 배치했다. 그러나 이러한 배치는 규모를 확장하기 어려운 구조였다. 포스코는 과감하게 계획을 바꾸었다. 연간 500만t 이상의 대단위 제철소를 꿈꾸는 데 쉽고 편한 계획에만 연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우선 해안선을 파 들어가는 굴입항만을 선택했다. 10년 후를 생각하며 공장 배치 계획을 바꾼 것이다.

초창기 포항은 한적한 항구도시였다. 주변의 주거시설과 교육시설은 변변치 못했다. 또 한번의 결단을 내렸다. 현장 건설과 조업도 중요하지만 먼저 직원들의 생활이 안정되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직원들을 위해 먼저 사원주택단지를 조성하고 학교도 지었다. 대단위 복지센터도 건립했다.

포스코맨 노란 제복이 포항 상징

청년들이 몰려들었다.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등 각 지역의 청년 수재들이 포항으로 밀려왔다. 그리고 독신아파트에 몸을 담았다. 이들은 밤낮으로 일을 했고 여가시간에는 포항 곳곳에서 그들만의 낭만을 이루고 문화의 싹을 튀운 것이다. 이들은 포항 최초의 실내체육관과 최초의 잔디구장에서 스포츠를 즐겼고, 최초의 음악당에서 클래식을 감상했다. 그리고 송도 축항에서 트럼펫을 불었고, 또 형산강에서 흐르는 물을 화폭에 담기도 했다. 멋진 복지센터에서 커피를 마시며 여가시간을 보냈다.

노란제복은 최고의 인기였다. 서울 말씨에 하얀 얼굴 그리고 안정된 봉급생활은 포항 처녀들의 가슴을 두드리기에 충분했다. 심지어 노란제복만 입으면 시내 어느 주점에서도 외상거래를 할 수 있던 시절이었다. 이들이 결혼해서 인덕아파트와 지곡아파트로 번져나갔다. 포스코 맨의 생활과 활동은 송도와 해도 죽도 그리고 오거리 육거리를 통해 포항의 새 문화를 형성했다.

이렇듯 포항문화의 중심에는 포스코가 있었다. 제철보국의 사명감과 우향우 정신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 포스코 맨. 이들은 영일만 신화를 확산시켜 국가경제발전에 선도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포스코가 위기를 맞고 있다. 세계 철강산업의 불황과 신성장엔진 발굴의 어려움으로 창사이래 최대의 위기상황에 처해있다. 설상가상으로 원가절감으로 인력구조가 경직되게 운영되고, 전례없는 안전사고도 연달아 발생하고 있다. 직원들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시민들은 근심어린 눈길을 주고 있다.

헌 것을 버리고 새 것을…

권기봉 회장이 힘을 주어 말한다. “이제 기존의 포스코 정신을 수정할 때입니다. 21세기가 원하는 네오-포스피리티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조선시대를 보내고 근대사회를 맞이한 것처럼 새로운 시대정신에 입각해 옛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그렇다. 무조건 `하면 된다` 식의 정신이 지금에는 덕 보다 실이 많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45년 전의 성공 인식이 오히려 21세기 창조형 인재들에게 사기만 저하시킬 뿐이다. 최근 우리는 밀어붙이기식 행정이 얼마나 시민의 호응을 얻지 못하는지를 목도하고 있다.

모성은 교수가 말을 잇는다. “포스코 맨의 사기를 높이고 지역주민과의 심리적 거리를 좁히는 전략이 필요합니다.”

이선덕 회장이 의미심장한 말을 붙인다. “이 세상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도시와 기업과 산업도 언젠가는 쇠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신성장 동력 발굴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해야 한다. 포스코의 경영전략과 포항의 발전전략을 연계시키고 조율해야 한다. 반 백년을 보낸 우향우 정신을 수정하여, 새로운 창조경제의`네오-포스피리트`를 만들어야 한다.

◇ 대표집필:모성은 교수

◇ 문화특강:나영기 전 경실련 공동대표

◇ 사진촬영:안성용, 황종희

◇ 집필지도:신일권, 이나나

◇ 취재동행:박계현, 이선덕, 신중규, 권기봉, 동행단체 한마음사랑후원회(천태성, 정경식, 박창교, 이길호, 김영미, 이영숙)

◇ 제작책임:사단법인 문화와 시민

▲ 모성은 교수를 비롯한 두바퀴路 참여자들이 포스코역사관에서 기념촬영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