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기자단의 두바퀴路 ⑶ 노비의 비석을 찾아서… 충비 단량의 고장 구룡포

▲ 두바퀴路 문화취재단이 최근 조선시대 영의정을 지낸 황보인의 충비였던 단량의 비석이 있는 구룡포를 답사했다.

지난달 27일 오후 1시 포항시립 중앙아트홀 앞 광장. 초여름 같은 따스한 햇살 아래 `두바퀴路` 문화탐방 참여자들이 하나 둘씩 모여 들었다. 성급하게 반팔차림을 한 청소년 취재기자의 모습도 보였다.

여기는 다시 구룡포 읍민도서관. 2층 강당에 스무 명이 넘는 취재단이 둘러앉았다. “안녕하십니까. 구룡포 방문을 환영합니다. 오늘은 조선시대 천민계층의 문화를 이야기 하기 위해 충비(忠婢) 단량(丹良)의 비를 답사하고자 합니다.”

서인만 구룡포 읍민도서관장은 말을 이었다. “역사는 영웅의 편에서 기록됩니다. 기득권과 권력자의 역사에 가리워진 비주류의 역사에 심한 갈증을 느낍니다.”

상전인 영의정 황보인 계유정난때 척살되자
손자 `단` 물동이에 숨겨 8백여리 야반도주
현재 포항시 대보면 정착, 황보씨 가문 이어

포항에 여자 종 비석 3기나

그렇다. 아직 노비의 비석을 본 기억이 없다. 노비 즉, 노(奴)는 남자종, 비(婢)는 계집종을 말한다. 그런데 포항에는 조선시대 충비 즉, 계집종의 비석이 3기나 있다고 한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없는 중요한 문화자산임에 틀림없다.

먼저 구룡포에 있는 단량의 비석을 탐방하기로 했다. 단량은 조선시대 영의정 황보인의 여종이었다.

세종대왕의 둘째아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킨다. 즉,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려고 난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영의정 황보인은 수양대군의 편에 서지 않고 끝까지 단종의 편으로 분류되어 척살되지 않을 수 없었다.

1453년 10월10일 밤 황보인이 살해된다. 계집종 단량은 가문의 멸문지화만은 피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리고 영의정 황보인의 손자 `단`을 물동이에 숨겨 머리에 이고 탈출을 시도한다.

정처없는 야반도주를 시도한 것이다. 길고 험난한 태백준령을 물동이를 인채 여인의 몸으로 홀로 넘었다. 밤낮 없는 고단한 걸음은 계속되었다. 황보인의 막내사위 윤당이 살고 있는 봉화군 상운면 닥실리까지 팔백여리 길을 걸어서 도망한 것이다.

그러나 그곳도 여의치 않았다. 다시 정처없는 길을 떠나 동해안 어느 한적한 바닷가 마을로 두 번째 피신을 시도한다. 그곳이 오늘날 포항 남구 대보면 집신골이었다. 이곳에서 단량은 황보단을 지극 정성으로 키워 훌륭한 성인이 되었다.

영조, 황보인에 `충정공` 시호

이렇게 영천 황보씨(永川 皇甫氏)의 가문은 혈통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단`의 증손 `억`이 구룡포 성동리로 이주하여 새 삶의 터를 형성하였다. 290년이 지난 후 숙종 때 이르러 신원되어 영의정 황보인과 그의 아들 `석`과 `흠`은 관직을 회복했다. 황보인은 영조로부터 충정공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았다.

“…. 정조 15년에는 지방의 선비들이 광남서원(廣南書院)을 세웠다. 그리고 그들의 위패를 모셔놓고 황보인과 두 아들의 충과 의를 기리고 있다. 황보인의 비석과 함께 서원 뒤편에 충비 단량의 얼을 기리기 위해 비석을 세웠다. 충비 단량의 덕으로 혈통을 유지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지금도 구룡포에는 마을 단위로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황보 성씨가 살고 있다고 한다.”

서 관장의 강의가 끝나자 취재단은 페달을 밟았다.

구룡포항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뱃공장 언덕에 올랐다. 부둣가를 가로질러 언덕에 오르는 자전거의 힘찬 페달, 그리고 시원하게 얼굴을 때리는 해풍은 상쾌하게만 느껴진다.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한 바다`라는 전설처럼 빼어난 절경과 풍부한 어장을 가진 곳이기도 했다.

북쪽 건너편 언덕위에 적산가옥들도 보인다. 적산(敵産). 자기 나라의 영토 안에 적국의 재산을 일컫는 말이다. 일본인들이 과거 건축해 살았던 가옥들을 개조해 근대문화 역사의 거리로 꾸민 곳이다.

먼 바다에는 귀신고래가 물을 뿜으며 헤엄을 친다. 그 뒤를 쫒는 포경선의 부산함도 환영처럼 가물거린다. 극단가인이 공연한 `구룡포 프리덤`을 너무 감명 깊게 관람해서일까. 정혜 작가의 글이 너무 감동적이라서 일까.

북서쪽 산기슭에는 `조선의 마지막 군마`들이 풀을 뜯는다. 말목장성에서 재복이가 마지막 군마 태양이를 훈련시키는 모습은 너무나 한가롭게 느껴진다.

“…. 읍내에는 철이 아닌데도 과메기 냄새가 진동한다. 가게마다 구룡포 대게의 홍보물이 걸려있는 것으로 보아 삶은 대게의 비릿한 냄새와 과메기의 비린내를 혼돈했을 것이다.”

구룡포 이야기가 끝없이 꼬리를 문다. 그러나 항구에만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었다. 숨겨진 문화자산 충비 단량의 비석이 있는 광남서원으로 향했다.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성동3리 236번지가 그 곳이다. 서 관장의 말씀에 성동리 메뚜기마을을 찾으면 된다고 했다.

`두바퀴路` 취재단은 31번 국도에 몸을 실었다. 구룡포항에서 출발해 포항 공항 쪽으로 가지 않고 남쪽 장기·감포 쪽으로 가다가 7km지점 삼거리에서 우회전을 하니 성동 메뚜기마을이 나왔다. 지난번 뇌록을 채취하려 오른 뇌성산 반대편 기슭이다. 구룡포와 장기면의 경계선 쯤 된다고 하겠다.

단량 비석, 문화재 지정해야

광남서원의 터는 참으로 안온했다. 사방이 낮고 동글 동글한 산으로 둘러싸여 평온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오목한 분지 같은 곳에 광남서원은 위치하고 있었다. 마을의 가구 수는 약 20 가구정도 된단다.

서원은 1791년 11월에 건립되었다. 처음에는 세덕사(世德祠)라고 불렀다. 그후 1831년 8월부터 광남서원으로 호칭을 바꾸어 불렀다.

서원에 들어서니 내부는 한가로웠다. `두바퀴路` 취재단 이외의 다른 관광객은 보이지 않는다. 중심건물은 `숭의당(崇義堂)`이라고 쓰여 있었다. 황보인의 절개와 변하지 않았던 의를 기리기 위해 쓴 글인 것 같다. 그 뒤편 계단을 오르니 조그만 사당이 나오는데 그 입구에 `충비 단량지비(忠婢 丹良之碑)` 라고 쓰인 낡고 초라한 비석이 보였다.

너무나 보잘 것 없는 모습이었다. 그토록 중요한 문화적 가치를 가진 비석이 문화재 지정은커녕 외부에 그대로 방치되고 비바람을 고스란히 맞고 있었다. 더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있었다. 원 비석을 그대로 둔 채 이를 다시 해석해 세운 모조 비석이 오히려 비각 안에 고이 모셔져 있다는 점이다.

한마음사랑후원회 권기봉 회장이 한 마디 건넸다. “우리나라에서 노비를 위해 세워진 비석은 많지 않아요. 광남서원의 충비 단량의 비석은 그만큼 역사적 가치가 높은 유물입니다. 포항시에서는 다른 노비의 비석과 함께 문화재 지정에 노력해야 합니다.”

사단법인 문화와 시민 박계현 이사장이 말을 이었다. “신분제도가 엄격했던 조선시대, 미천한 계집종의 비석을 세워 평등과 충절의 얼을 기린 것은 분명 문화적 의미가 깊습니다. 작은 비석에 얽힌 소중한 정신, 후세에 남겨 줄 귀중한 문화자산일 것입니다.”

이미자 `구룡포 처녀` 들으며

취재단은 읍내 모모식당으로 향했다. 선착장을 지나 중앙다방 골목길로 50m 들어오니 식당이 보였다. 구룡포에서 가장 특징있는 만찬을 즐기기 위해서였다. 모모식당은 3대째 고래 고기만 파는 식당이란다. 얼큰한 고래국밥으로 허기를 채운 뒤 해산 인사를 건냈다.

귀가 길은 해변도로를 타고 돌았다. 구룡포항에서 석병리, 대보리, 호미곶을 거쳐 대동배리로 돌아 포항의 환상적인 일몰을 즐기기 위함이었다.

승합차 속에서 `구룡포 처녀`가 울려 펴졌다. 누군가가 스마트폰으로 1970년대 들었던 이미자씨의 노래를 검색한 것이다. 만능 엔터테인먼트 김효은 원장이 이에 어깨춤을 추며 박수를 치며 흥을 돋우었다.

귀가길에 선 `두바퀴路` 참여자들의 가슴은 뜨겁게 불타 올랐다.

△대표 집필:모성은 교수
△문화 특강:서인만 구룡포 읍민도서관장
△고증 자문:황인 구룡포 향토사학자
△청소년기자:모영준, 손혜진, 최요정, 김명채
△사진 촬영:안성용, 황종희
△동행취재단:박계현, 김효은, 신일권, 이나나, 권기봉, 정경식, 김병수, 김명헌, 박창교, 송광호, 김향미
△제작 책임:사단법인 문화와 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