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경우 편집국장

초등학교 즈음엔가 이순신 장군의 위국충정을 이야기하면서 등장하는 시조를 배울 때다.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에서 `일성호가`는 무슨 뜻이며 `애를 끊다`는 것은 또 무슨 말인가. 지금이야 인터넷 검색만으로, 또는 한자 뜻풀이로 해석이 가능하지만 이 시조를 배울 때는 그러질 못했다. 한 줄기 슬픈 피리소리쯤으로 해석되는 `일성호가`의 의미는커녕 분위기를 도무지 알 수도 없고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선생님도 몰랐던 것은 아닐까.

기도를 유지하라. 군 훈련소에서 응급처치를 배우면서 기도를 유지하라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내가 알고 있는 기도는 손바닥을 모으고 간절히 바라는 기도에서 단 한 발자국도 진전되지 않아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그 기도 유지라는 것이 음식물이 식도를 타고 역류해서 숨을 막지 않도록, 또는 코피가 흘러 코를 막아 숨을 막지 못하도록 고개를 옆으로 돌리라는 것이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한참 뒤였다. 왜 숨을 쉴 수 있도록 하라는 쉬운 말을 그렇게 어렵게 했을까. 교관도 몰랐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공부에서도 너무 어려운 길을 걸어왔다. 수학이라고 하면 왠지 머리가 텅 비어버리는 수치(數痴) 수준은 아니라도 방정식이라면 괜히 주눅이 들고 뒷머리가 당기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진작 이런 교육 방법이 왜 도입되지 못했는지 궁금해진다. 학창시절에는 그런 골치아픈 수학을 왜 만들었을까 따지고 싶을 때도 있었다. 파스칼은 지독한 두통에 시달릴 때마다 수학으로 고통을 이겨냈다지만 보통 사람들은 집중력을 기르기보다 오히려 두통을 경험하는 것이 수학이다.

스토리텔링. 올해 초등학교 1, 2학년을 시작으로 차차 대상을 확대해가며 수학을 재미있게 공부하도록 수학에 이야기를 입힌다는 거다. 우리 나라 학생들이 수학이나 과학 올림피아드 같은 국제경시대회에 나가서는 세계 상위권을 휩쓸지만 정작 수학 성적에서는 하위 수준으로 떨어진다고 한다.

교육학자들은 그 이유를 창의력에서 찾는다. 그래서 교육 방법을 공식 외우고 문제풀이를 반복하는 방식에서 스토리텔링을 입힌 창의력 발현으로 바꾼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창의력이 국민 행복과 연결될까.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20번이나 반복했던 행복이 아이들의 수학 교육 방법을 바꾸는 데서도 찾아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 `왜 그럴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그 해결책을 스스로 찾는 것이다. 생각의 힘을 키워 공식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며 이것이 수학을 스토리텔링으로 바꾸는 이유라는 거다.

생각의 힘,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만들어진다. 비천한 현실을 욕하며 스스로를 속이고 살면 그 비천함에서 헤어날 수가 없다고 제임스 앨런은 `위대한 생각의 힘`에서 갈파했다. 비록 현실은 어렵고 힘들더라도 부단히 자신을 연마하고 생각을 키우며 바른 자세로 살아간다면 어느 날 자신이 현실과는 맞지 않게 부쩍 자라나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 현실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이야기다.

방법을 바꾸는 것. 이제는 성공이 아닌 행복이다. 공부도 성적 지상주의에서 이해 중심으로 바꾸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취임사에서 국민 행복시대를 열겠다고 선언하지 않았나. 왜 공부에 목숨을 걸고 공부로 성공해야 하는가? 결론은 행복해지기 위해서가 아닌가. 이번 수학 스토리텔링이 그 행복을 찾아가는 여러가지 방법을 가르쳐주는 교육을 하겠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싶다.

수학에 스토리텔링을 입히고 그런 교육을 통해 공식을 스스로 만들어간다면 장차 인생에서도 난관에 부딪칠 때마다 극복하는 방법을 연구해 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 첫 단추가 이번 수학 교육 바꾸기에서부터 기대한다면 너무 지나친 비약일까. 내가 너무 `오바`했나. 어쨌든 새내기 학부모들의 걱정과는 반대로 기대가 큰 교육 방법의 변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