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대환 작가

그저께 밤, 대선후보 3인의 TV토론을 지켜보았다. 자주 짜증이 치밀어서 돌릴까 했으나 혹시 정책 차이를 발견할까 하여 끝끝내 돌리지 않았다. 내 소감은 실망스러운 토론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 모양으로 만든 주요 원인은 이정희 후보와 눈치뿐인 사회였다고 생각한다. 무슨 선거법이 이따위냐 하다가도 3번 후보가 따발총 말솜씨로 떠들어댈 때마다 의구심이 솟구쳤다. 저런 얼굴이 과연 한국 진보의 얼굴인가? 나는 이른바 `이념의 경계`안에 갇혀서 살지 않는 작가지만, 나와 같은 시청자도 지켜보는 그 화면에서 그토록 `목적지상주의`를 맘껏 발휘해도 되는 것인가?

내가 보기에 한국 진보에 가장 시급한 기본자세는 `겸손과 예의`이다. 그러나 목적지상주의에는 겸손과 예의가 존재하기 어렵다. 그 이념, 그 사상에서 겸손과 예의는 거추장스런 액세서리에 불과하거나, 언제든지 겸손과 예의를 위선용 도구로 활용할 수도 있고, 그것들을 공격의 창칼로 둔갑시킬 수도 있다.

보수를 하든 진보를 하든 어떤 사람들은 정말 똑똑한데도 도대체 왜 인간의 가장 근본인 그 무엇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일까? 보수를 탐욕으로 규정한 진보는 탐욕에 대한 저항을 거창한 도덕적 기반으로 삼는다. 탐욕의 세력과 무리를 향하여 저항하는 인간이기 때문에 자기는 언제나 정의와 선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의도 좋고 선도 좋고 투쟁도 좋다. 그러나 어느 것이든 제일의 근본은 `인간됨`이다.

인간의 가장 근본인 그 무엇을 상실했다는 말은 `인간됨`을 상실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다시 묻는다면, 왜 배울 만큼 배우고 공부할 만큼 공부한 인간들이 탐욕의 늪에 빠져서 그런 줄도 모르고 날이면 날마다 `돈 계산`이나 하게 되고, 그런 탐욕의 세력에게 저항한다는 신념에 불타서 겸손과 예의를 다 팽개치고 날이면 날마다 `정치적 계산`에만 골몰하게 되는 것일까?

우선, 나는 디지털 시대의 인간들이 저마다 인간의 마음속에 흐르는 `강(江)`을 까맣게 잊어버린 탓이라고 본다. 4대강사업에 반대하는 투쟁이 있었지만, 그 투쟁의 목소리도 인간들에게 그의 마음속에 흐르고 있는 강을 한번쯤 들여다보게 하거나 느끼게 만들지는 못하고 말았다. 정치적, 환경적 투쟁의 효과를 얼마간 올리긴 했겠으나, 우리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인간들의 심성을 좀 더 차분하게 만들어주는 효과를 전혀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내가 만난 강 중에서 사람의 마음속에 흐르는 강은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달타`에 등장하는 강이다. 기나긴 방황의 여정을 거의 마친 뒤에 이윽고 늙어가는 싯달타는 묵상 속에서 흐르는 강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는 정답게 흘러가는 강기슭에서 수정과 같이 투명하고 신비로운 물결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강은 여러 가지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혹은 푸른 눈, 흰 눈, 혹은 수정같은 눈, 혹은 하늘빛 같은 눈으로 보고 있었다. 오, 그렇다. 그는 그 강물의 가르침을 배우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이 흐르는 강물을 이해하는 사람은 다른 모든 인생의 비밀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싯달타는 깨닫는다. “모든 창조물의 소리들이 이 강물 속에 있소. 만일 그 수천 가지 소리를 동시에 들을 수 있다면 강은 당신에게 무슨 소리를 할까요?”

탐욕, 탐욕과의 투쟁. 양쪽 다 이제는 자기 마음속의 강부터 만나기 바란다. 20세기의 역사는 이미 웅변해주었다. 잘못된 자본주의가 인간을 이윤 창출과 그 착취의 도구로 취급했다면, 그것을 해방시킨다고 했던 공산주의혁명은 너무 많은 인간의 생명을 정치적 투쟁의 도구로 취급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