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오신 객원 논설위원 로타리코리아 이사장·발행인

암각화에서 제사장이 탄생시킨 갑골문자는 세월을 두고 꾸준히 발전해서 오체를 만들었다. 갑골문이 가장 잘 나타난 금석문은 요동 벌을 호령한 고구려 19대 광개토왕 비석에서 볼 수 있는 비문이다. 선이 가늘지만 힘이 있고 고졸하고 변화무상하다. 갑골문에서 발달된 전한(前漢)대 오체가 가장 잘 살려졌다. 임신서기석이나 포항시 신광면 냉수리비, 울진 봉평리 신라 고비보다 더 수려하고 힘이 넘치는 글 획으로 채워져 있는 우리나라 최고 문화재이자 동아시아의 역사서이다. 고졸하고 뼈다귀 골격이 살아 숨 쉬는 광개토왕능비의 수준은 안진경체를 넘는 것으로 4세기 고구려 문화가 정점에 올랐다가 다시 내려서는 환원의 이치까지 후세에 남겼다.

더욱이 고구려 신라 비는 조선시대 비보다 더 강한 돌을 써서 문화재적 가치도 높다. 국내에 현존하는 조선시대 초기 비의 음각된 글자가 풍화작용에 마멸 정도가 심한 것은 상대적으로 석질이 무른 돌을 썼기 때문이다. 반면에 고구려·신라 비의 글 선이 천년 풍상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석질이 강한 돌일수록 글 획을 깊이 파고, 글 선을 살리기 힘든 것을 극복한 장인정신이 깃들었기 때문이다.

우리 서예 역사를 살펴보면 광개토왕비의 글씨를 환생시킨 후생이 해동 서성(書聖)김생이다. 김생 이후로는 기교만 살린 글이 난무하다 조선시대 말에 가서야 추사 김정희 대에 가서야 김생환원이 됐다.

8세기 당(唐)대를 살았던 학사들은 해동 신라인 김생의 글 앞에서 절을 올리고 친견을 했다고 한다. 글체가 얼마나 힘이 있고 수려했던지 천둥 벼락 치는 느낌이 내면에서 솟아오른다고 적었다. 해동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탄생했지만 당나라 학자들이 인정을 했다는 것이다.

물론 같은 시대를 살았던 신라(김생), 당(왕휘지), 왜에서 살았던 세 명의 걸출한 학사 가운데 당도, 왜도 신라의 김생을 으뜸으로 꼽았다. 한국 서예의 전형(典型)을 처음 세운 김생(金生·711~791)을 통해 우리 서예의 역사와 현재, 그리고 내일을 살펴 볼 수 있게 된다.

글체가 발전하지 못한 원인도 있었다. 왕조시대에는 당나라나 해동 모두 초서보다는 해서 예서 같은 얌전한 글씨가 발전했다. 신하가 왕 앞에서 글 획이 자유스럽고 삐침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초서를 당연히 쓸 수 없는 반면 왕이나 황제의 글씨는 초서가 주류를 이루었다. 반면 언제 죽을 지 모르는 무장의 글씨는 눈치 안보는 초서가 많다.

퇴계 이황이나 서애 유성룡의 글체는 너무나 얌전하다. 이런 전통은 중국 공산당 모택동까지 이어졌다. 모야 자신이 황제나 마찬가지였으니 초서를 갈겨써도 탓할 관료가 없었을 것이다.

서법이 있고 그림은 법이 없다. 노송일지도(松一支圖)에서 세월을 머금고 비뚤어진 관솔가지가 글씨의 한 획이 될 수 있었던 반면 동양화는 장강만리를 장지 한 장에 표현할 수 없다. 그래서 서(書)는 법이 따르고, 화(畵)는 여여 하여 절제의 미(美), 숨겨진 언어(메타포)가 필요한 것이 다르다.

그림이나 글씨모두 여백이나 선을 중요시하는 것을 빼고는 한번 붓 간곳은 다시 고칠 수 없고, 붓 길의 속사의 이치는 같다. 얼마든지 다시 고치고 그리는 서양화는 달리 힘들고 발묵하는 기교가 반드시 따라야 한다.

김생의 금석문 연구를 새로 시작하고 글씨 재현에 몰두하는 소산 박대성 화백은 오는 12월26일 필신(筆神)김생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은 안동에서 탄생 1300년을 기념하는 해동서성김생특별전(海東書聖金生特別展)을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