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오신 객원논설위원 로타리코리아 이사장·발행인

414년 고구려 장수왕이 중국 길림성 집안현(集安縣)에 세운 선왕 광개토왕(고구려 19대왕, 375~413)비는 현존하는 한국 최고의 비석이기도 하지만 중국에서도 100비 내에 올리고 자기네 동북아 역사편년에 넣고 있다.

전혀 다듬지 않은 화강암(높이 6.39m, 너비 1.38~2m)에 전서에 가까운 예서 1천775자가 음각돼 더 거대하다. 글씨체는 전한(前漢)시대다. 호태왕비는 청나라 봉건주의가 몰락되었던 조선후기까지 확인되지 못함으로써 신묘년조 논란에다 155자 가량이 무리한 탑본으로 판독을 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남아있다.

광개토왕비는 세 부분으로 나뉜다. 제1면 1행에서 6행까지는 시조 동명성왕이 나라의 기틀을 세운 기록이다. “천제의 아들이시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시며 알을 가르고 세상에 내려오시니 나면서부터 거룩한 △을 갖추셨다.<중략> 비류곡(沸流谷) 서쪽 산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우셨다” 제1면 7행부터 3면 8행까지는 1천개에 이르는 크고 작은 성을 고구려 영토에 편입시킨 광개토왕의 정복전쟁기록으로 채워져 있다. 능비의 건립을 밝히는 마지막 부분은 3면8행부터 4면9행까지이다. 이런 역사기록이야말로 4세기 한반도와 중국의 역사 사회 문화현황을 연대별로 알 수 있을 진실한 기록물이어서 중국에서도 절대가치를 인정하는 국보로 보호 받는다.

이곳을 방문했었던 한국화가 소산(小山) 박대성(朴大成) 화백은 집안에서 압록강을 바라보는 광개토왕능비를 처음 보는 순간 작은 산이 가린 것처럼 거대하게 보였다고 한다. 갑골문에서 나온 전 예서체의 글체를 보고 더 놀랐다고 한다. 글을 쓴 선지식이 밝혀졌다면 8세기 동아시아의 서성(書聖)으로 평가받았던 신라 김생의 수준을 뛰어넘었을 것이라고 했다. 비석의 글체는 한 자 한 자 뼈가 살아있고 고졸한 느낌이 들다가도 휘몰아치는 폭풍우 같은 기가 서려 있고, 글 획 마다 제비꼬리 같은 아름다움이 살려진 글체가 천둥 벼락이 치는 느낌으로 다가왔다고 했다. 소산화백은 그날 이후부터 금석문 등 글체 연구에 더 빠져 들었다고 한다.

일찍이 해동 대문장가로는 고운 최치원(857~경주 사량부)이다.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지은 `황소의 난` 격문은 지금도 유명하다. 고운의 격문을 본 반란의 주인공, 황소는 양심의 가책으로 비틀거리다 말에서 떨어졌다는 일화는 지금도 유명하다. 그런 최치원도 신라에 돌아와서는 6두품 벼슬로 천대받았다. 중국 양주에는 최치원 기념관과 최치원 마라톤, 백일장이 해마다 열린다. 중국에는 공자가 없고, 한국에는 최치원이 없는 현실이 아이러니하다.

김생은 글씨로 해동서성(海東書聖)에 올랐다. 400년을 앞서 김생을 능가하는 또 한 사람의 서성(書聖)이 고구려 땅에 있었지만 비문 말미에 이름을 남기지 않아 필명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쉽고 아쉬울 뿐이다. 금석문에 푹 빠진 한국화가 소산은 동아시아에 크게 알려진 안진경체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호태왕비의 글체가 빼어나다고 지적했다. 당시 고구려에서 유행했을 글체는 동 아시아의 권력구도와 문화를 집대성한다. 광개토왕이 동아시아를 호령할 수 있었던 것도 문화적 힘이 뒷받침이 되지 않았으면 불가능했다. 역사의 흐름이 이를 증명해 준다.

호태왕 비는 인간의 손이 전혀 미치지 않은 자연석이다. 원래는 부부(夫婦)석이었다. 어느 날 현몽에서 백발의 신령이 나타나 이 돌은 국가의 미래를 밝히는 큰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는 바로 집안으로 걸어 들어 왔다고 한다. 당시의 기술로서는 집채보다 더 큰 거석을 옮기는 기술이 없었으니 탄생부터 강대한 고구려의 기운을 받았던 신령스런 돌이었다. 문자는 상은시대 암각화에서 출발, 제사장(祭司長)이 갑골문을 탄생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