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적의 침입로 지켜낸 `국토 수호의 보루`
포항 화진해수욕장 일대, 임란 당시 유골·활촉 발견되기도
경주성 탈환은 `문천회맹` 중심의 의병과 관군의 뜻깊은 승리

▲ 포항 화진해수욕장 일대는 `골곡포`(骨谷浦)라 불릴 만큼 의병과 왜군이 격전을 벌였던 곳으로 해마다 현충일에는 무명용사에 대한 위령제가 열리고 있다.

경북동해안은 바다를 중간에 두고 일본과 마주 한 지리적 특성 상 고대에서 부터 근현대에 이르기 까지 왜의 노략질과 전쟁을 온몸으로 막아내야 했다. 신라 천년 동안에는 수도 방위의 최전선이었으며 한낱 변방의 신세에 처한 조선에서도 국토 수호의 보루이자 중심무대였다.

이러한 전략적 요충지로서 고려말에는 포항에 통양포수군만호진이, 조선시대에는 영일진이 설치돼 수군이 주둔했으며 오늘날에는 최정예 해병대의 고장이기도 하다.

칼날 같은 샛바람을 맞으며 높은 파도를 헤치고 단련된 경북동해안의 민초들은 거듭되는 외침의 시련 속에서도 한반도의 등뼈를 지켜냈으며 그 자부심은 오늘에 이어지고 있다.

글 싣는 순서
<3부=고난에 단련된 국토의 등뼈>

16)변방, 국토수호의 현장- 항쟁1
17)포화에 휩싸인 근현대사- 항쟁2
18)위리안치를 이겨낸 유배문학
19)후천개벽을 도모한 땅- 동학
20)험한 노동을 감내한 민초들

임란의 격전지, 포항 골곡포(骨谷浦)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에 나타나는 왜적의 동해안 침입은 수십회에 이르는데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후반까지 왜구 및 왜병의 진격로이자 격전지가 바로 포항이었다. 내물왕 38년(393) 5월에는 5일 동안 금성을 포위하고 공격한 왜적들이 굳건한 옹성에 막혀 퇴각하다 이를 추적한 보병 4만명에게 포위돼 독산(포항 북구 신광면 소재지)에서 대패하고 물러났다는 기록이 있다.

개포(포항 북구 월포리)는 신라 이래로 수군진(鎭)이 설치돼 병선이 배치되고 3곳에 해자를 설치했는데 바닷바람이 너무 심해 고려 우왕13년(1387)에 수군만호진이 설치되면서 통양포(포항 북구 두호동)로 이동한다. 문헌에 따르면 통양포만호진에는 병선 8척, 수군 218명이 배치돼 있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영남지역은 초기의 치욕적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전직 문관이나 유생들이 선봉에 서서 의병을 결성했다. 이는 관북지방의 의병장이 주로 전·현직 무관인 것과 대조가 되는데 충성심과 자존심이 강한 영남의 사림들이 무장항전의 지도자로 나선 결과이다. 당시 경주부 관할이던 포항지역 의병장은 남구 대송면 사정리 출신의 수월재 김현룡과 그 형제들, 임란 후 북구 신광면 우각리에 은거하며 종군 경험을 용사일기(龍蛇日記, 용=조선, 뱀=왜)에 남긴 오의정 이의온, 해일당 이설, 남강 이여랑 등이 대표적이다.

이 가운데 창의장군(倡義將軍)으로 불린 수월재는 5형제가 의병장으로 나서 우정과 우호, 두 사람이 전사하는 아픔을 `형제산 남쪽의 강물은 푸르구나. 혼이여 혼이여 돌아가기 더디지 말게. 몸을 가벼이 여겨 순국하였으니 유감 없으리. 효도는 집에서만 아니고 충으로 옮겼구나.`라는 시 `서천초혼가`를 남겼다.

포항 북구 송라면 화진해수욕장은 대표적 격전지이다. 왜의 보급부대가 백사장에 침입해 주둔하자 이 지역 의병들이 송라면 대전리 대동숲에 매복해 있다가 야간에 급습해 새벽까지 3전 3승의 혈전을 거듭했다고 한다. 임란 이후 이 일대를 골곡포(骨谷浦)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 마을 북쪽에서 벌어진 격전으로 전사자들의 유골과 활촉이 지난 1930년대 이전까지도 간간이 발견됐다고 전한다.

이후 북구 청하면 일대의 지역 유지들은 해마다 6월 6일 현충일에 화진해수욕장에서 위령제를 열어 호국의 원혼들을 위로하고 있다.

▲ 포항 남구 장기면 수성리 소재 의병장 정유서의 유허비에는 임란 당시 장기지역 전투상황이 기록돼 있다. /장기발전연구회 제공

의병항쟁사의 기념비, 경주성 탈환
20만의 왜군은 1592년 4월 13일 부산포에 침입해 21일에는 영남의 거진(巨鎭)인 경주읍성을 함락시켰다. 왜군은 좌로, 중로, 우로의 세 길로 나눠 한양을 향해 북상했는데 경주는 가토 기요마사의 부대가 담당한 좌로에 위치한 격전지였다.

여러 차례에 걸친 공성 작전 끝에 9월 8일 탈환한 경주성 전투의 영웅은 문천회맹(蚊川會盟)을 중심으로 한 경주부 일대 의병과 함께 비격진천뢰를 활용한 장수 박의장의 공이 컸다. 그가 쓴 관감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9월초 7일에 용감한 군사만을 뽑아서 밤중에 성을 덮쳐 진천뢰(震天雷)를 터뜨리니 적병이 불에 타 죽은 자가 수없이 많았다. 적이 넋을 잃고 소리지르며 당황하더니 이튿날 밤에 부산으로 도망쳐가거늘 추격하여 30여명을 죽이고 성을 탈환했다. 성안에는 아직 창고에 곡식이 4만여 석이나 있었다`.

조선군은 경주성 탈환으로 국토의 동로(東路)를 확보하게 돼 왜군의 보급로와 통신망을 차단하는 성과를 이뤘다. 국왕이 국토의 끝 의주로 피하고 왜군이 평양성과 회령에 진출한 상황에서 경주를 중심으로 한 의병과 관군은 고립 상황에서 자력으로 왜군을 격퇴함으로써 경상좌도에 생기가 돌게 됐다.

임란이 끝난 뒤 조정은 공을 세운 9천60명을 표창했다. 특히 의병들에게는 선무원종공신록권을 1, 2, 3등급으로 나눠 주었는데 경주부원은 1등 13명, 2등 33명, 3등 63명 등 109명이 포함됐다. 경주 의병활동에서는 한 집안에 의병장이 여럿 있었다는 점이 특이한 점으로 평가되고 있다.

임란 명장들을 배출한 영덕
영덕은 임란 당시 혁혁한 공을 세운 명장들의 출신지이다.

경주부 판관으로 경주성 수복을 이뤄낸 박의장 장군은 영해 원구 출신이다. 개전과 동시에 부산성에서 정발 장군 휘하의 중위장으로 참전해 전몰한 장희식 장군은 영덕읍 화개리 출신이다.

또 하양전투에서 공을 세운 박홍장 장군, 영해의 군기시판관 남의록, 영일현령 김난서, 김제군수로서 공을 세운 뒤 전사한 영해 출신 정담 장군 등이 대표적이다.

또 의병 가운데 찰방 조현, 생원 이함, 유학 백현룡 등은 홍의장군 곽재우의 화왕진에 합류해 활약했다.

왜군은 평해 백암과 영해 서쪽 창수면 삼계리와 수리 쪽으로 진격해 왔는데 영해 경계에는 1592년 음력 7월 25일 이후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영해에 침입한 왜군은 모리길성과 추월종장, 고교원종 등 장수의 부대로 서울을 점령한 뒤 강원도로 침입한 일부가 동해안으로 남하했다.

영해전투는 해흥 백인국, 신규년, 배태원 등의 의병장이 참전했다. 이들은 남하하는 적을 맞아 관군과 함께 창수면 위정계곡에 매복해 적을 습격하려고 했으나 왜군의 선발대를 본진으로 오인해 공격하다가 대병력에 역포위돼 신규년을 비롯한 대다수가 전사했다.

이밖에 영덕 출신 김기하, 성하 형제는 정유재란 때 울산 서생포 근처의 창암에서 김기하가 전사했지만 김성하는 명장 마귀와 함께 왜적에 대승을 거뒀다. 왜군의 주력부대 통과지점이며 후방보급로인 대구의 공산성 전투에서도 영해 출신 이함, 백인경 등이 공을 거뒀다.

▲ 경주 황성공원 내 경주임란의사추모탑에는 당시 경주부에 속한 경북동해안 일대 의병 355명의 이름이 올라 있다. /장기발전연구회 제공

마분동에 새겨진 울진의 항쟁
울진에 왜군이 침입한 것은 행주산성 전투에서 패배한 왜군이 서울을 벗어나 일부가 경상도 해안으로 퇴각한 시기로 추정된다. 울진의 향토사가들은 임진왜란전황도를 통해 왜군이 강릉과 삼척을 거쳐 영해까지 내려간 점에서 이를 유추하고 있다.

왜병의 공격에 김언륜은 고산성에 주둔하던 주호 장군을 찾아가 의논하고 의병을 모집했다. 또 갈령을 넘은 왜군이 부구와 죽변으로 치닫자 덕천리 마분동 십장곡에서 김천상 등의 부장을 모아 작전을 세웠다.

하지만 적을 매복작전으로 급습한 김장군은 반격작전에 휘말려 28세의 나이로 전사한다. 이때 역전분투했던 이 골짜기를 분투곡(奮鬪谷)으로, 사람과 말이 수없이 죽어 쌓였다 하여 마을이름이 마분동(馬墳洞)으로 붙여졌다고 전한다. 대장을 잃은 휘하 장수 김천상 등 9명은 고목리 구장곡에 모여 통곡하다가 손가락을 깨물어 받은 피를 놓고 하늘에 제사를 올린 뒤 선조가 파천한 의주로 향했다고 하지만 이후 행적은 전하지 않는다.

울진읍 고성리 구만동 출신인 주호는 서면 소광리의 안일왕산성에 피신했다가 돌아와 300여명의 의병을 모집했다. 8월말에 왜병들이 `남무묘법연화경`의 주문을 쓴 깃발을 앞세우고 쳐들어 오자 옹성하면서 끝까지 싸우다 몰사했다고 전한다.

그 부인 장씨는 왜군이 능욕하려 하자 끝까지 기개를 지키며 맞서다 순절했는데 한 왜군이 기록을 전함으로써 7년 전란이 끝난 뒤 선조 36년(1603년) `봉열대부사재감첨정`의 벼슬이 주호에게 하사되고 장씨 부인에게는 영인(令人)이라는 작위가 주어졌다고 전한다.

인조 14년(1636)의 병자호란 때는 기성 사람 김응선이 아우 응남과 함께 의병 100여명을 이끌고 서울로 진군하던 중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에 통곡하다가 의병들을 해산시키고 귀향했다. 하지만 그는 일생 동안 타인과 접촉을 끊고 지내다가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특별취재팀 = 임재현, 정철화, 이용선(이상 본사 기자), 김용우 향토사학가, 장정남 한빛문화재연구원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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