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오신 객원논설위원 로타리코리아 이사장·발행인

금강산 그림은 겸재 정선(鄭敾:1676~1759)만큼 잘 그린 사람은 우리 역사에는 없을 것이다. 삼성 미술관 리움이 소장한 국보 217호 금강전도(1734년, 종이에 엷은 채색 94×130.6cm)나 고려대학교박물관이 소장한 금강도(剛山全圖:絹本淡彩 34×28.5cm)는 일만 이천 봉우리가 한 송이의 꽃으로 피어난 것처럼 보인다. 그림 상단에 빼곡하게 쓴 제발(제사(題辭)와 발문(跋文)을 아울러 이르는 말)에도 겸재만이 갖는 시각이 표현돼 있다.

경상도 청하현감시절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내연산 폭포(리움소장)도 절벽을 휘감는 물길모습이 금강전도의 아름다움에 비길만하다. 17세기를 살았던 겸재가 금강전도에서 새로운 기법을 등장시킨 것은 당시 유행했던 실학과 국문학과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겸재가 우리 자연에 대한 관심은 중국전통회화를 답습하는 시대상황에서 벗어나려는 강한 움직임이다.

일설에는 16세기 후반 가사문학(歌辭文學)을 일구었던 송강(松江) 정철(鄭澈, 1563~1594)의 관동별곡(關東別曲)에 나오는 외금강 가사가 겸재를 끌어 들였을 것이라고들 했다.

며칠 전 골동상을 40년 넘게 들락거린 지인이 “내게는 왜 겸재의 그림이 손에 닿지 않았을까하는 회한이 늘 사무친다”고 말하면서 겸재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동네 환쟁이의 금강산그림이 어렵사리 자신의 손에 들어왔다고 기뻐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장지바닥에 담채로 그려진 금강도는 직선화법의 봉우리 모습이 겸재의 진경산수 전통화법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조선시대 민화에서 나타나는 익살스런 맛이 봉우리마다 달리 그려져 민화수준을 뛰어넘는 그림이었다고 한다.

당시에도 금강산에 가보지 못한 민초들의 애환을 장지바닥에 옮겨 그 한들을 풀어 주었던 것 같다. 금강산은 그만큼 유명하다.

겸재보다는 한참 늦게 태어난 최북(崔北·1712~?)은 내금강 구룡연을 둘러보다 돌연 천하명산에서 죽어야 한다며 뛰어내렸으나 죽지는 않았다. 중국 회화에서 우리 것을 고집했던 최북(일명 최칠)은 만년에 들어서 자신을 환쟁이로 보는 세상이 싫어서 자신의 눈을 뽑아버리고, 기행을 일삼은 것으로 알려진 그 시대의 불우한 선지식이었다.

경주 배동에서 삼릉능지기로 자처하면서 살아가는 소산 박대성 화백의 금강도는 현존 작가로서는 가장 유명하다. 소산은 금강전도를 어안도로 그렸다. 깎아지른 절벽 아래에는 인간의 근원지인 집이라는 상징물을 절묘하게 들어 앉혔다. 먹과 붓이 뒤섞이며 강렬한 에너지가 그림을 흔드니 이것이 수묵이 갖는 카오스다.

명산이 있어 천하명인(天下名人)이 태어나는 법이다. 조선시대에는 겸재 정선이 이 산의 아름다움을 그렸고, 21세기에 들어서는 먹 하나를 붙들고 40년을 치열하게 산 박대성 화백이 천하명산을 재조명했다.

금강산은 사계절마다 풍악산 개골산으로 이름이 달리 붙는 것이 또한 천하(天下)명산(名山)답다. 불교가 성행했던 고려시대, 해동 보살이 사는 금강산이 있다는 화엄경(華嚴經)에서 유래했다.

불교적 명칭을 늘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조선시대 유생들이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삼신산의 이름을 하나 더 붙였으니 봉래산이다. 금강산에 대한 간절함은 예나 지금이나 죽음의 문턱이 될 만큼 강렬하다.

필자는 처음엔 배타는 것이 싫어서 미루었고, 두 번째는 국제로타리에서 아프리카 아시아를 돕는 자원봉사에 빠져 육로로 가는 여행조차 놓쳐 버렸다. 금강산 관광이 중단된 지 벌써 4년째다. 12월 대선이 끝나고 남북관계가 풀려 금강산 가는 길이 열리면 이번에 맨 먼저 신청서를 쓰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