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상선학교 실습선 조난 계기로
우리지역 최초 등대 세워져
유배된 日人등대수 살해 비화도

포항시 남구 대보면에 위치한 호미곶등대<사진>는 경상북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돼 보존되고 있다. 그 점등 시기를 두고 1903년과 1908년 12월 등 이론(異論)이 있는데 그 건립 배경을 들여다보면 일제 강점 직전 약소국으로서 겪은 한국 근대사의 이면이 드러난다.

지난 1967년 고 박일천은 `일월향지`를 통해 `장기갑 등대의 괴이`라는 제목 아래 고종 광무 50년인 1901년 일본 실습선 `응웅환`의 표류와 등대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한다.

당시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러일 전쟁을 준비하는 등 세력 확장에 나선 가운데 나가사키상선학교 실습선 응웅환에 교사와 생도 30여명을 승선시켜 우리 해역의 해류와 어족, 수심 등을 조사하고 다녔다. 하지만 영일만 장기곶을 지나가다 암초에 부딪혀 조난을 당해 승선자 전원이 익사(이는 착오이며 사망자는 4명)하는 사고를 당했다. 일제는 조선이 연안 해난시설을 갖추지 않아 일어난 인재라며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등 생트집을 잡았다. 이에 못이긴 조정은 국비로 일본인에게 공사를 맡겨 우리 지역에서 최고, 최초의 등대를 세우게 됐다.

이에 일대의 주민들은 `(국토의) 호랑이 꼬리에 불을 지르니 등대가 무너지면 불바다가 된다`며 이주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또 하나 일본은 등대수로 본토의 살해 혐의 죄수를 임명해 유배의 벌로 삼았는데 피해자의 아들이 복수에 나서 그와 가족들을 살해한 참극이 벌어진 것으로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