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종흠 시사칼럼니스트

이제 대통령 선거가 2개월 남짓 앞으로 다가왔다. 남은 기간이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 하지만 현재의 선거전 진행양상을 보면 유권자들의 후보 검증과 선택을 위해선 남은 기간은 너무나 짧다고 할 수밖에 없다.

우선 야권 후보 단일화 문제가 대선의 가장 큰 변수로 남아 있어 누가 최종 후보가 될 것인지 확실치 않은 상황이 유권자들의 시야를 혼미하게 하고, 그것이 후보 검증의 시간적 여유를 빼앗고 있다.

특히 이번 선거에는 무소속으로 안철수 후보가 빅3의 유력주자로 등장했지만 이제야 정책공약을 발표함으로써 후보간의 정책적 차별은 물론 그의 품성과 역량을 파악하기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대선에서 가장 중요한 정책검증이 선거이슈로 크로즈업되지 못하고, 후보들의 이미지 조작과 공방이 선거판을 흔들고 있다. 정책검증이 실종되고, 이미지 선거가 기승을 부린다면 향후의 국가와 국민의 운명은 엄청난 위험과 불안 속에 던져질 수밖에 없다.

최근 후보진영과 지지세력간에 벌어지는 이미지 선거양태 중의 하나인, 이른바 미래형 지도자냐, 과거형 지도자냐 하는 문제의 시비도 국민들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최근 지도자형 시비는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나이든 세대의 지지, 아버지인 박정희 시대에 대한 역사적 판단, 보수적 안보관 등의 요인을 들어 과거형 지도자로 몰아 붙이는 것이다. 이에 비해 문재인·안철수 후보는 젊은층의 지지, 민주화운동 경력, IT경력, 대북포용정책 등의 요인을 들어 미래형 지도자로 분류하면서 우회적으로 옹호·지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어쨌든 대선에서 지도자형 분류는 일단 판단의 잣대가 될 수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같은 잣대는 시대정신에 비추어 타당성이 있어야 하고, 엄정하게 검토돼야 하는 것이다. 예컨대 20-30대 지지층이 많은 안철수 후보는 미래형이고, 50-60대 지지층이 많은 박근혜 후보는 과거형이라든지, 박 후보 아버지시대의 권위주의 체제와 그에 따른 희생자에 대한 반성과 사과 시기가 늦었다고 과거형이라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 대북포용정책을 쓰면 미래지향적이고, 조건부 대북지원책은 과거형이란 분류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 단순 지표만 가지고 미래형과 과거형으로 분류하는 것은 진실을 왜곡할 수도 있고, 판단을 그르칠 수 있다.

좀 거창하게 얘기한다면 인간사회의 가장 역설적인 원리는 `과거는 현재를 만들고, 현재는 미래를 만들지만 현재속에서 만들어지는 미래의 씨앗은 보수를 뛰어넘는 진보와 창의가 보수 속에 함께 동거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인간 사회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사회질서의 유지를 가르치면서 기성질서를 개혁하는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는 교육인 것이다. 정치지도자도 기성사회의 유지를 통해 사회안정을 꾀하면서 사회발전의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는 점에서 역설적인 어려움이 있다. 나이가 많다고 반드시 퇴행적이거나 현실고착적 태도만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편견이다. 역사에서 나이 많은 개혁자들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북한인권 문제에서 대체로 연령층이 높을수록 적극적 개입의 태도를 보이는 것은 국제적인 기준으로 보면 진보적이라 하겠다.

박정희시대의 평가는 정치적 평가와 산업적 평가로 나누어 하는 것이 이미 세계 보편의 입장이고, 박근혜 후보가 과거 아버지 시대에 어머니의 대행을 한 것과 아버지 시대의 여러 정치적 문제에 대한 연좌적 문책은 우리의 헌법적 가치에도 맞지 않다. 이미 박 후보는 6월항쟁 후에 이룩된 민주체제하에 정치 입문을 했고, 민주화시대의 법치에 따라 국민의 대표로 활동을 해 왔다. 그의 구체적인 태도를 밝히는 시기가 늦어졌다고 과거형으로 판단하는 것은 지나친 독단이다. 오히려 여론 조사에 기대어 정치노선이 다른 후보들이 정권 교체와 단일화를 명분으로 국민의 `묻지마 선택`을 조장하는 것이 시대착오적 과거형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호남에 가서 범죄적 대북송금 특검을 사과하는 후보의 법치관은 과연 미래형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