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오신 객원논설위원 로타리코리아 이사장·발행인

경주시 동부동에서 북부동을 잇는 경주읍성은 사적 96호로 지적돼 있었을 뿐 신라문화재에 가려 상당기간 그냥 버려져 있었다. 최근 들어서 그 중요성을 알고 복원작업에 나선 경주읍성은 조선시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 행정적의 기능을 함께 했던 돌 성이다.

경주읍성은 근세까지 가장 잘 보존된 성이었지만 문화재의 중요성을 잘 몰랐던 시기와 나라전체가 전쟁의 폐허로 혼란을 겪었을 즈음 인근 주민들에 의해 파손됐다. 지금도 성 주변의 민가 담장에 박힌 돌들은 읍성을 허물어 가져다 쓴 돌이다. 성 돌은 일차적으로 한번 다듬어져 있어 담장을 쌓기가 수월했기 때문에 더 빨리 파손되었을 것이다.

경주는 또 국보급 신라 문화재가 수두룩한 고도여서 조선시대 유적이 천대받았던 원인도 있을것 같다. 경주 읍성이 다른 도시에 있었다면 벌써 복원이 돼 그 지방 최대 관광지로 대접 받았을 것이다. 경주는 석굴암·불국사·남산유적지 등 우리나라가 외국에 내놓는 대표적 문화재들이 줄지어 있는 곳이니 조선시대에 조성된 읍성이 복원 우선순위에 들 수가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도 읍성의 가치는 크다. 개발에 밀려 많이 손상되긴 했지만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찾아내고 100% 복원해야 경주는 천년에서 이어진 도시로 품격을 갖출 수 있다. 지금 모습을 드러낸 읍성은 극히 일부분이다. 문화원으로 사용중인 동헌과 경주 객사를 중심으로 서부동에서 계림 초등학교에 이르는 범위는 확인됐다. 문제는 해자를 근거로 한 사실복원이다. 경주시 서부동 우방 아파트 뒤편은 해자에서 흐르는 물을 모아두는 곳이다. 이곳에서 출발한 해자는 남문자리였던 횟집과 제일교회를 거처 구 경주극장 앞 읍 청사를 끼고 흐르는데, 도시행정가의 짧은 안목이 복개란 큰 잘못을 저질렀다. 어느 땐가는 해자도 복원해야 할 것으로 본다.

1960년대 초까지 남아 있었던 경주읍 청사 정원에 심어진 500년 생(추정) 느티나무는 그 당시 최고의 휴식자리로 주민들의 쉼터였다. 더욱이 느티나무를 두 줄로 휘감고 올라간 등나무는 500년 고목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이 시절 경주로 수학여행을 왔던 학생들이 패싸움을 벌이다 달아나던 학생이 가끔은 해자로 떨어져 패싸움의 위기에서 벗어나기도 했던 추억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그 시절 읍성에서 나온 장대석, 주초석은 물론 축조 때 사용된 돌들을 대부분 집을 짓는 데 사용했거나 외부로 유출돼 담장 용도로 사용됐다. 이 때문에 복원공사를 할 경우라도 윤기가 있고, 특유의 경주 돌 색을 지닌 석재를 제대로 맞추기가 힘들게 됐다.

경주성은 이장손의 비격진천뢰로도 유명하다. 1592년 선조 25년 9월1일 판관 박무의공이 경주를 수복할 때 조선의 발명가이자 화포장이었던 이장손(李長孫)이 만든 비격진천뢰를 성 밖에서 발사해 큰 효과를 보았다고 선조실록이 기록하고 있다. 비격진천뢰를 성 안으로 쏘자, 이것이 뭔지 몰랐던 적들이 구경하느라고 서로 밀고 당기며 만지다가 포가 터져서 적장을 포함한 20명이 즉사를 해 이튿날 성을 버리고 서생포로 도망했다고 한다.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는 대완포구(大碗砲口)에 넣어 쏘면 500~600 걸음 밖 성안에 떨어졌다.

경주 읍성은 불편한 진실도 간직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숭유억불 정책이 본격화되면서 불교 석조유물들이 타깃이 돼 엄청나게 많은 유물들이 파손됐다. 실제로 동부동 성루에 쌓인 돌들을 들여다보면 부서진 석탑과 장대석들로 성루 가운데 공간을 채웠을 만큼 많은 불교석조유물들이 파괴됐다. 모두 다 신라 사찰에서 옮겨온 것들이어서 파손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경주는 미래 천년을 내다봐야 한다. 지난 천년을 이으려면 더는 미루지 말고 신라 조선을 잇는 문화벨트를 잘 간직해야 한다. 그것이 미래 천년을 맞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