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오신 객원 논설위원 로타리 코리아 발행인

북경을 다녀온 연암 박지원은 우리 민족의 심성(心性)을 `좁쌀`로 비유한 적이 있었다. 좁은 땅덩어리에서 얼굴을 맞대고 살아가면서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걸핏하면 싸우고 송사를 일으키는 편협하고 각박한 처신을 두고 한 말이다.

생각에 갇혀서 안절부절 할 때가 많다. 해와 달은 그 무량한 빛으로 차별 없이 세상을 구석구석을 두루 비춘다. 무한하게 풍요롭다는 생각을 가질 때라야만 비로소 스스로도 풍요로워 질 것인데도 말이다. 세상사는 일이 하루같이 지지고 볶는 일이다. 흡사 불난 집(火宅)이다. 지식은 하루하루 늘어나 쌓이지만 도는 하루하루 덜어야 이룰 수 있다. 원효의 일통(一統)사상도 이와 무관치 않다.

원효의 화엄경도 넓게 유추해보면 일통사상이다. 원효가 화엄경을 쓰던 시대적 상황은 신라 백제 고구려가 해동의 좁은 땅덩어리 안에서 서로를 치고 죽이는 민족 간의 다툼으로 해가 지는 줄 몰랐던 시기이다. 원효는 철이 들어서 보니 겨자씨보다 적은 내면의 세계에서 마음을 가져온 것을 알았다. 그는 무의식의 세계에서 자기 마음을 꺼내 오기까지 밑바닥에서 피 땀을 흘리면서 내공을 쌓는 치열한 삶을 통해 화엄학이란 큰 깨달음을 세상에 내놓은 해동 성자다. 이미 깨달음을 얻고 대 철학자가 된 원효의 입장에서 보면 민족 간에 죽이고 죽는 일은 덧없는 짓거리였을 것이고, 이때부터 일통(一統)사상이 가슴깊이 자리 잡았을 것 같다.

석가모니가 설한 8만4천 법문 가운데는 훌륭한 인격, 도를 이루려면 나를 비우고 버리는데서 출발한다는 말이 있다. 나를 버리는 것이 인격완성의 지름길인 셈이다. 마음을 비우려면 자신이 지난 시절에 쌓았던 지식과 경험, 번뇌를 불러 들일 갖가지 기억들을 지우는데서 출발한다. 인간은 14세 소년·소녀 때부터 정신에 때가 끼기 시작한다고 한다. 그 때부터 쌓인 모든 기억(좋고 나쁨)들을 우주로 던져버리면 쉽게 해결나지만 그것이 간단치 않은 일이다. 그래서 고민이 생기고, 성격 파탄이 뒤따르고, 고통스럽다.

숨겨진 관념 속에는 좋은 기억보다는 나쁜 기억들이 더 숨어 있다. 이걸 버리는데는 명상이라고도 하고, 정신분석학적으로는 어두운 부분을 싹 씻어내는 관념세정((觀念洗淨)이라고도 한다. 수도관에 끼인 물때나 거친 녹은 쉽게 지워지지 않으나 한번 해 볼만 하다.

무념(無念)이라는 것은 나눠줬다는 마음이 없는 자리다. 무아(無我)는 안으로 나(我)라는 마음이 없는 마음을 일컫는다. 부처의 법문인 팔만대장경도 따지고 보면 무념(無念)과 무아(無我)의 세계를 이중 삼중으로 설명해 놓은 것이다. 불성은 본래 실타래처럼 길고 긴 생각이 끊어진 자리이다. 법구경은 “생각을 한곳에 모아 욕심이 동하게 하지 말고, 뜨거운 쇳덩이를 입에 머금고 목이 타는 괴로움을 스스로 만들지 말라”고 했다.

인생 40이면 세상일에는 잘 흔들리지 않게 된다 해서 불혹세대라고 말한 공자는 “자신에 대하여는 깊이 책망하고 남에 대하여는 가볍게 책망하면 원망은 멀리된다”고 했다.

요즘 정치인들이나 사회 지도자들이 걸핏하면 들고 나오는 소통 역시 심성이 바탕이 되지 않고는 쉽지 않다. 철학자 아우렐리우스는 “다른 사람의 속마음으로 들어가라. 그리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당신의 속마음으로 들어오도록 해라”고 했다. 인간의 삶은 산 능선이나 강줄기처럼 곡선으로 뻗어 있다. 능선을 타는 사람은 사는 것 자체가 풍요하니 수월할 수 있지만 계곡을 타는 사람의 마음을 다잡기가 쉽지 않다.

조병화의 한 줄짜리 시 “결국, 나의 천적은 나였던 것이다” 결국이란 부사엔 너무 늦은 깨달음, 돌이킬 수 없는 회한의 감상이 묻어 있는 것으로 보면 심성은 자기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우주로 가려는 마음공부에선 나를 공격하는 적의 정체가 알고 보니 나였다는 얘기였다.